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의문들 (외 3편) / 심보선 본문
의문들 (외 3편)
심보선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殮)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주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면
사람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봐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내일이 올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여 광포해져라
하면 바람은 아니어도 누군가 광포해질까
말하자면 혁명은 아니어도
혁명적인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을까
어떤 의문들이 이 세계를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기에
아이들의 붉은 입술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끝없이 옹알댈까
나날들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좋은 일들
내가 오늘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있는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헤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흘려보내주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이상하게 말하기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손목시계 위의 시간을 읽는다
분침과 시침 사이에 펼쳐진 고요와
고요 아래 짹깍거리는 소요를 헤아린다
빛과 어둠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지는 오후
자라나는 애처럼
죽어가는 새처럼
나는 이상하게 말한다
나는 산책에서 상념을 지우고
길가의 낙엽더미에 왼손을 묻었다
내가 죽기 전에 미리 죽은 손
이라 말한다면 이상하겠지
내가 그녀에게 입 맞췄을 때
그녀의 머리는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입이 내 입 안에 향기 좋은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이 신기한 계절로 흐르나보다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내 그림자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바라본다
내 그림자가 네 그림자보다 더 진했었지
라고 말한다면 서글프겠지
나는 마침내 고개를 떨군다
서글퍼서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꽃 한 송이가 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머릿속에서 온갖 꽃들이 시드는 오후다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이상한 말들을 중얼대는 오후다
몇 시인가 시계를 들여다보니
고요와 소요가 정확히 반으로 나뉘는 시간이다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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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 197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그리고 컬럼비아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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