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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선택 유도하는 죽음의 문화에서 벗어나야

오선민 2011. 5. 26. 08:31

극단적 선택 유도하는 죽음의 문화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의 정신건강이 걱정입니다. 오늘은 한 아나운서의 자살을 둘러싼 여러 현상들을 보면서 욕을 얻어먹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각오로 편지를 씁니다.  

여러 유명인사의 자살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언론과 네티즌이 처음에는 한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몹니다. 장기판의 외통수 신세가 된 사람은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그러면 언론과 네티즌은 그 사람에게는 입을 다물고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희생자로 삼아 들개처럼 달려듭니다.

사람이 죽으면 용서가 되고 그 사람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죄인이 되는 문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보다 가슴 아픈 또 하나의 피해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것,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망자(亡子)에게 무조건에 가깝게 관대한 문화와 산 사람에게는 함부로 막말을 하는 문화, 혹시 이런 문화가 대한민국을 ‘자살공화국’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냉정히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문화라면 자살충동에 취약한 사람은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자살을 하면 많은 것이 용서가 되고, 때에 따라서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까지 있으니까요.

언론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제 ‘시골의사’ 박경철 씨와 한 사진기자가 트위터에서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박 씨가 ‘조사를 마친 시신’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보고 기자들을 원색공격하자, 한 사진기자가 “기자들은 마음이 아픈 소식도 보도해야 할 천직 의무가 있다”고 맞받아쳤지요. 두 사람이 서로 사과하면서 논쟁을 끝냈는데, 그럴 사안이 아닙니다.

언론은 모든 사실을 보도해야할 권리도, 의무도 없습니다. 특히 자살보도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2004년 7월 한국기자협회는 ‘자살보도권고기준’을 채택, 자살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동기를 함부로 단정하는 것과 같은 선정적 보도를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보도가 모방 자살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습니다. 한국 언론은 금세 잊어버리고 추측성, 선정적 보도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까마귀 언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살은 우울증 환자에게서 많이 일어납니다. 이번에 극단적 선택을 한 아나운서도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의사의 입원 권고를 거부하고 집으로 갔다가 벼랑 끝 선택을 했지요. 언론과 네티즌의 공격은 자살의 촉매가 된 것이고요.

우울증 환자의 주위 사람은 자살 예방 수칙을 철저히 인지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 자살한 사람을 합리화하고 신원(伸寃)하는 문화를 없애야 합니다. 자살에 대해 흥미 위주로 보도하는 언론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또 남을 함부로 욕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짓인지 인식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생명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은 절대 컴퓨터처럼 리셋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삶에서 늘 힘들 때가 생기며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 훌륭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살충동을 극복한 사람을 존경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링컨은 자살의 유혹을 극복한 대표적인 위인이지요. 그는 자살충동에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호주머니에 칼이나 총을 넣고 다니지 않았고 나무에 목을 매고 싶은 충동을 피하려고 혼자 숲속을 산책하는 것도 피했습니다. 그는 큰 뜻과 신앙심, 유머로 우울증을 극복했습니다. 많은 우울증 환자는 순간의 충동을 극복하면 충분히 잘 살 수가 있습니다.

자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뜻을 모아 무엇인가를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