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햇반에 고추장 비벼먹는 (외 1편) / 전동균

오선민 2011. 8. 15. 15:47

햇반에 고추장 비벼먹는 (외 1편)

 

                                                전동균

화성에 갈까봐

화성에, 화성에 가서 토끼를 키울까 봐

 

마태수난곡을 들으면

햇반에 고추장 비벼먹는 저녁이면

아무도 기억할 수 없는 기억 저 편에서 기차는 달려오네

 

검은 옷 입은 사람들 가득 찬

그러나 텅 빈 기차는

역도 없는 바닷가 모래밭에 나를 남겨두고

블랙홀 같은 파도터널로 사라지고

 

화성에, 화성에 갈까봐

화성에 가서 눈이 붉은 토끼들과 탁구를 칠까봐

귀를 쫑긋대며 블루스를 출까봐

 

닫힌 문을 보면, 별 일 없니?

걱정스레 안부를 묻는 마음들

시장 좌판에 쪼그려 앉아 마늘을 까는 손들

밥 먹는다는 일의 누추와 장엄

 

—꿈 따윈 가지지 마, 그럴수록 고통스러우니

사슬에 묶인 채 악기를 켜듯

잎 푸른 나무들 어둡게 불타오를 때

 

나는 내 뒷모습을 만나고 싶어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는 해마들의 얼음바다,

그 처음이며 끝인 시간을

 

 

                 바람에 화상을 입다

 

 

사막을 건너올 버스를 기다리네

 

허벅지 다 드러낸

‘소녀시대’의 Gee Gee Gee가 휘몰아치는 경성대 사거리

신호등 무시한 채

말을 탄 낯선 자들 지나가고

오 인육을 뜯으며 즐겁게 짖는

들개들

 

사람을 기다리던 시절은 갔으니, 이제

사람처럼 올

오륙도행 버스를 기다리네

해 뜨는 벌판에 앉아 싱글벙글 똥을 누던 이

스스로 자일을 끊고 만년설 속으로 걸어간 이

하이에나의 피를 제게 주소서, 밤새 기도하던 이

그들 중 하나인 듯

 

자욱한 황사의 양떼를 몰고

바람은 펄럭이는데

어디서 출발했는지, 뭐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진

않지만

슬쩍, 속옷 들추듯 내세를 보여주는 저 유목의 바람도

숟가락이 덫이어서, 희망에 속은 제 몸 빠져나가지 못해

여기까지 흘러와 아파하느니

 

물병 하나 폭탄처럼 들고 서서

2-1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오륙도는 내내 바닷물에 잠겨 있으리

가끔 숨비소리처럼 떠올랐다 가라앉으리

다만 눈먼 파도들이 말하리, 여기 수많은 생이 있었다

모래먼지 일으키며 왔다가 모래먼지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모두, 저를, 용서하지, 못했다,

 

 

—《시와 사람》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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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균 / 1962년 경주 출생. 1996년 《소설문학》으로 등단. 시집 『함허동천에 서성이다』『거룩한 허기』등. 현재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