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활 (외 2편) / 강정

오선민 2012. 1. 25. 17:19

(외 2편)

 

                              강 정

 

시간이 이 세상 밖으로 구부러졌다

시여, 등을 굽혀라

 

고양이 새끼가 운다

어미 고양이를 삼키고 사람이 되려고 운다

 

급류를 삼킨 노을이

노을이 아빠가 되려고 운다

 

떠돌다 지친 다리가

다른 인간의 눈이 되려고

멀고 먼 샅으로 기어올라온다

 

빛이 어디 있는가

뒤집어진 어둠의 골상을 판독하려

한나절의 시름이 그다지 깊었다

 

못 나눈 정을 전염시키려

낮 동안 오줌보는 그토록 뾰로통했다

 

혈관에 흐르는 오래된 문자들을

고양이의 꿈이 딛고 지나는 이마 위에 처발라라

 

팔다리는 공기가 멈춘 나무

낭심 아래엔 죽은 별 무더기

 

구부러진 어깨를 펴라

갈빗대에 힘줄을 얹어

마지막 숨을 길게 당겨라

 

발끝으로 세계의 끝을 밀어내고

이승 바깥에서 돌아 나오는

흰 새벽의 눈알을 찔러라

 

터져 나오는 세계의 명치에 구름을 띄워

이면이 없는 幻을 쳐라, 고요히 실명하라

 

실명하라

 

 

 

고별사

 

두 개의 내가 있다고 합니다

둘은 하나의 상대어일 뿐,

알고 있는 모든 수의 무한 제곱일 수도 있습니다

 

허기가 폭발할 땐 쇠든 돌이든 턱없이 삼켜

스스로 불이 되려고도 한답니다

주여, 이 씹새끼여, 외치며

호방하게 술잔을 비운 다음

어두운 괄호 같은 게 되고 싶어도 한답니다

 

몸 안의 모든 욕구를 비워

풀잎의 살랑임에도 바스러지는

깨끗한 적막이 되려고도 한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가 고플 때엔

혼자 받는 밥상이 순연한 노동처럼 귀히 여겨져

조용히 입 다물고 마른침만 삼킵니다

그저, 당신의 여윈 몸만 한없이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전쟁의 포성 아래에서도 풀이나 뜯는 노루 같은 게 되어

이 세상과는 사뭇 다른 흙 속의 비밀로

순한 문신을 새기고도 싶어집니다

내겐 예쁜 무늬만 보면 늘 마음 아파지는 착한 소녀도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계속 멀리 눈감고 계셔도 됩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면 길게 목을 빼고

하늘만 바라봅니다

넋 나간 기린처럼 이 세계에서 지워져

순결한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다시 태어날지 모를 일입니다

구름이나 창가의 화초 따위가 제 이름을 되뇌며

하늘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저 먼 곳에서 생의 모든 걸 돌이키는 우주의 붉은 점막일 뿐입니다

 

푸르른 유성들이 잘게 조각나면서 당신이 알고 있는

어떤 시간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 어디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시간의 합은 역사의 종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별처럼 쪼개져 당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가느다란 무르팍 사이에서

잃어버린 처녀막이나 다시 꿰매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머니를 다시 낳을 수도,

먼저 간 피붙이의 못다 운 울음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한때, 미망을 탐침하는 가을볕을 죽창인 양 휘둘러대며

당신의 붉은 입술을 짓찢은 적 있었지요

나는 불을 보면 환장하는 방화범의 후손입니다

아무리 서글프게 물을 들이켜도 뿜어져 나오는 건

방향도 없이 나부끼는 불길뿐입니다

검게 탄 시신이 되어 나는 오늘도 내가 흘린 모든 이름과

내가 벗어던진 모든 가면의 표정들을 오래도록 되새깁니다

당신이 누구였냐고 묻거나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존재하였기에 당신을 부르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를 믿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별들이 무한 제곱으로 밤길을 새로 가설합니다

나는 걷습니다

내 걸음의 시작과 끝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걷습니다

무한 제곱으로 찢어지는 발걸음들이 각자의 몸을 찾을 때까지

이 정처 없음은 나의 유일한 정처일 뿐,

 

나는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오래도록 나를 향유하셔도 됩니다

버리거나 즐기는 것도 당신의 몫입니다

나는 짓밟히는 게 천분이 된, 그저 하나의 길일 뿐입니다

단 하나의 어두운 길로 영원히 불타오르길 바랄 따름입니다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집니다

벼락은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내 종족의 눈빛,

천공이 제 몸을 열어 나를 받습니다

나는 나를 기억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긴 울음의 엄밀한 정도(正道)만 흙 속에 새겨놓을 것입니다

 

 

月蝕

 

창가에 박힌 달을 혀로 핥는다

쓰고 텁텁하고 차갑다

삶의 끝과 죽음의 끝이 한 몸 안에 겹쳐 흐른다

입과 항문이 허공에서 만나

하늘 한가운데 새하얀 구멍으로 빛난다

 

왕복권을 손에 쥔 여행객처럼

별들이 몸속을 드나든다

숨을 쉴 때마다 지나간 시간의 구린내가 환하다

그 안에서

한 여자가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청바지를 입은 남자의 몸에서

팬티만 걸친 남자가 황급히 빠져나간다

허공에 걸린 바지를 꿰어 입으며

여자가 먼 곳을 바라본다

으깨진 빛들이 여자의 눈 속에 정액으로 흐른다

새롭게 물이 차오르는 강가

벌거벗은 남자가 섬으로 떠오른다

 

달이 떠 있던 자리가

환하게 비었다

 

—시집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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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 1971년 부산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가을호로 등단. 시집 『처형극장』『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키스』『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