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스크랩] 영문법 시간 / 신철규

오선민 2012. 4. 23. 12:12

영문법 시간

 

   신철규

 

 

 

쉽게 오는 것은 쉽게 가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지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쉽게 오는 것도 쉽게 가고 어렵게 오는 것도 쉽게 간다

나는 쉽게 와서 쉽게 가고 너는 쉽게 와서 어렵게 간다

 

건너편 플랫폼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저 여자

남겨진 손바닥 지문은 입김을 불 때마다 되살아난다

 

한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하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

간절한 것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가라앉고

사람들은 눈을 감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간절했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난자를 뚫고 들어간 정자는 도화선의 생을 마감했다

무한한 세포 분열은 죽음을 향해 간다

더 이상 분열될 수 없을 때 눈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지구에 모든 경사가 사라지면 돌은 구르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태양 별 은하수 빙하 사막 적도 그리고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멀리 있고

멀리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는 너무 멀리 있고 또 너무 가까이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햇살이 가파른 경사를 그으며 너무 먼 곳에서 와서

내 가까이에서 부서진다 구르는 돌은

언젠가는 멈추고 이끼가 몸을 덮는다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시와 소금》2012년 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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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 1980년 거창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대학원 박사과정.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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