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스크랩] 공(空)의 관람 / 이민하
오선민
2012. 4. 23. 12:13
공(空)의 관람
이민하
러닝타임도 모르는 계절 속으로
불나비 떼처럼 사람들은 입장을 하고
극적인 장면이 필요해서 봄날에도 눈은 날린다.
첫눈이 오면 우리 만나요.
새끼손가락을 거는 연인들의 비밀처럼 두근두근 개막되는
함박눈의 시즌.
관전 포인트는 공의 방향이다.
행운과 비극을 가르며 눈덩이처럼 날아오는
공은 허공을 빼돌리기 위한 연막 같은 것.
파리채처럼 휘두르는 방망이의 타이밍을 인연이라 부르며
사람들은 나이 한 살씩 득점할 때마다 무용담이 늘었다.
네 개의 계절을 돌며 생사의 룰을 나르는
도루의 패턴은 반복되지만
전광판에 찍힌 키스 파트너는 지난 시즌의 상대가 아니다.
흐름에 몰두하는 건 피하기 위해서다.
파울볼이 솟구치고 관람자들도 솟구치고
눈사태처럼 무너지는 난간 아래로 두 팔을 벌린 누군가 흘러내렸다.
공을 잡은 사람은 부러진 코뼈를 맞추고 있었다.
고개를 숙입시다.
삶의 자세를 전하며 어둠을 줍는 볼보이들과 주고받는
묵념과 교훈의 물물교환.
감쪽같이 난간은 복구되고
운동장은 텅 비었는데
꺼지지 않는 카메라가 장착된 내 손은 누구의 것인가.
노컷 장면이 되풀이되는 후일담 속에서
라인을 벗어난 당신이 줄기차게 날아온다. 경기의 일부처럼
피부로 에워싼 난간 밖으로 팔을 휘젓던
한 사람의 내가 끝없이 사라진다.
—《시사사》2012년 3-4월호
-----------------
이민하 /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