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스크랩] 발 / 정병근

오선민 2012. 11. 8. 17:20

 

   정병근

 

 

 

발등에 발을 동개고 TV를 보는

나를 본다

저 발로는 뭘 해도 글렀다

사랑이 글렀고 이별이 글렀다

태도가 글렀으므로 사람도 글렀다

 

어머니는 저런 발을 싫어하셨지

슬리퍼에 맨발은 더욱 질색이셨지

 —발을 잘 간수해야 고귀해진단다

양말과 구두 속에 잘 쟁인 발을

어머니는 간구하셨다

 

뻣뻣하게 누워서 툭 불거진 발

이리저리 리모컨을 누르며

요행과 한탕을 궁리하는 발

 — 아무데나 발 담구지 말고

어머니의 말씀이 예언처럼 엄습해 와서

 

잘못되리라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서

양말을 신고 구두를 신고

또박또박 바닥을 딛지 않으면

쪽박과 비천을 면치 못하리라

 

가지런히 모으거나 감추고서야

안심이 되는 발

조금만 방심하면

맨발로 막 살아 버리는 발

싸돌아다니며 아무에게나 구걸하는

 

 

 

                      —《불교문예》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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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근 /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불교문학》을 통해 등단. 2001년 《현대시학》에 「옻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번개를 치다』『태양의 족보』.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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