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비탈이라는 시간 / 최문자
오선민
2012. 12. 13. 14:07
비탈이라는 시간
최문자
나의 모든 비탈은
앵두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곤두박질치다
나를 만져 보면
앵두 꽃받침이 앵두를 꽉 잡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산비탈에 앵두나무를 심고
우리들을 모두 앵두라고 불렀다
앵두꽃이 떨어져 죽을 적마다
우리는 자꾸 푸른 앵두가 되었다
신작로에 나가 놀다가도
앵두는 앵두에게로 돌아왔다
어쩌다 생긴 흉터는 모두 앵두꽃으로 가렸다
붉은 흉터들까지
외할머니는 꼭 앵두라고 불렀다
푸른 앵두가 이제 막 익는 거라고 말했다
지난여름 내내
비탈에 있는 동안
폭우에 앵두나무 몇 그루가
몸부림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만져 보았다
앵두의 절반이 사라졌다
—《문학청춘》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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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 1943년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귀 안에 슬픈 말 있네』『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울음소리 작아지다』『나무 고아원』『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사과 사이사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