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경사 / 조창환

오선민 2012. 12. 13. 14:18

     경사

 

                                       조창환

 

 

봄부터 초여름까지 새들 날아와

장독 뚜껑에 고인 빗물 마시고 놀다 가더니

좁은 뜨락 빈 화분에 느닷없는 나팔꽃 피었다.

바지랑대 꽂아주니 덩굴이 쑥쑥 자라

담을 타고 기어오른다.

경사로구나.

흥부네 제비보다 더 고마운 딱새로구나.

보랏빛 꽃이 세 송이나 피었으니

하나는 지난봄 혼인한 작은아들 축의,

둘은 지난 학기 대학에 전임교수 된 큰아들 축하,

셋은 지난해 은퇴한 내 세상 만세,

그냥 이뻐서 물 마시러 오는 새에게 악수를 청하니

짧게 웃기만 하고 날아오른다.

네 번째 꽃 피거든 새로 연애라도 한 번 해보시란다.

 

—《미네르바》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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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환 / 1945년 서울 출생.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빈집을 지키며』 『라자로 마을의 새벽』『그때도 그랬을 거다』 『파랑눈썹』『피보다 붉은 오후』『수도원 가는 길』『마네킹과 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