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스크랩] 가족의 재구성/ 김연종

오선민 2013. 2. 28. 10:02

 

 

 

가족의 재구성/ 김연종

 

세상의 모든 호칭은 이모와

언니 오빠로 재편집 되었다

여보당신은 이미 삭제되었고

한 때 유행하던 자기야도 자취를 감추었다

할아버지 할머닌 고려장 모텔에 장기투숙 중

아빠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고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칩거 중이다

 

오랜만에 가족나들이를 간다

이모가 앞장서고 언니 오빠가 뒤따른다

매표소에도 마트에도 이모 투성이다

식당에 들러 맨 먼저 이모를 부른다

아줌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고

너무 젊은 이모는 슬쩍 언니로 대체된다

뒤처리와 계산은 모두 오빠 몫이다

 

가로등에 가물거리는 식구들을 들여다본다

할아버지 할머닌 유령처럼 토닥거리고

엄마 아빠는 서로의 손톱자국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간다

언니 오빠는 각기 다른 채널로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달빛에 취한 이모마저 슬쩍 酒房으로 사라지고 나면

룰루랄라 모텔의 네온 간판은 나른하거나 불안하다

 

- 웹진『시인광장』 201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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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날 가족 친척들이 많이 모일 때면 호칭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은 깬(?) 시부모가 많아서 그들이 윤허한다면 며느리가 ‘아빠’ ‘엄마’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분위기다. 다만 마땅찮게 여기는 친척 어른들의 눈에 발각될 경우 간혹 문제가 되기는 한다. 그보다는 아무데나 무차별적으로 들이대는 ‘언니’ ‘오빠’ 등의 호칭이 문제다. 남편에게도 ‘오빠’ 남편의 형에게도 ‘오빠’ 남편의 매형에게도 ‘오빠’다. 그러다보니 일가친척이 다 모이는 명절엔 피차 난감하고 헷갈려 아예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리를 피하려 든다.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여보당신은 이미 삭제되었고’ ‘자기야도 자취를 감추어’ 오로지 ‘오빠’ 아니면 ‘〇〇씨’다. 전에는 ‘본데없는 집안’이란 지적도 받았지만 요즘은 다들 그런가보다 한다. ‘〇〇씨’는 무난한 호칭이라 하겠으나 시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남편을 ‘자기’혹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큰 실례다. 그런데 남편의 형과 매형에게 부르도록 되어있는 ‘아주버님’ ‘서방님’ 역시 헷갈리고 어색하여 기피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도 처가에서 아내의 오빠의 아내인 ‘아주머니’를 ‘누님’이라 부르곤 한다.

 

 아주머니의 줄임말 격인 ‘아줌마’란 호칭에는 때로 악의적인 비하가 감춰져 있다. 십중팔구 상대를 폄하하고 무시하는 맥락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문학 모임에서 낮도깨비 같은 한 사내가 여성시인에게 “어이, 아줌마”라고 부르는 걸 본 일이 있다. 실제로 “아줌마 빠져”라는 말이 성폭력으로 제소되고, “아줌마 차 빼”란 말이 모욕죄로 고소된 사례도 있었다. 식당에서 ‘아줌마’가 자취를 감춘 건 진일보한 상황이겠으나, 그곳에선 사장님 아니면 죄다 ‘이모’라고 부른다. ‘너무 젊은 이모는 슬쩍 언니로 대체된다’

 

 호칭만 놓고 보면 개판 5분 전 상황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할아버지 할머닌 고려장 모텔에 장기투숙’하면서 ‘유령처럼 토닥거리고,’ ‘아빠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고,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칩거 중이다’ ‘언니 오빠는 각기 다른 채널로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가족들은 각기 제 팔만을 흔들며 해체되어가고 있다. 가족 간의 존중과 배려 없이 신 가족개념에 맞춰 헤쳐모이면서 가족이 재편성 ‘재구성’되고 있는 징후를 보인다.

 

 시인은 이러한 위기의 '나른하거나 불안한' 병리현상을 청진기로 진단하고 있다. 김연종 시인은 1962년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2004년『문학과경계』로 등단하였다. 현재 의정부에서 '김연종 내과' 원장으로 재직 중인 의사 시인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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