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평―내 마음의 오지/ 권영준
연평―내 마음의 오지/ 권영준
파도가 일렁이지 않았다면
바다가 울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섬이 젖어 있지 않았다면
울음 위에 떠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어야디야 어야디야
흩날리는 몇 두릅의 해풍은
저마다의 삭은 처마에 매달려
파시의 홍등을 추억하는데
녹슨 등대만 멍하니 꿈속에 있네
눈치 빠른 세월은 썰물에 다 쓸려나가고
곰삭은 추억만 남은
내 마음의 오지,
허공을 유목하는 가마우지가
사시사철 울음을 물어나르지 않았다면
파도에 실려 일렁거리는 저 거대한 설움이
끝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 계간《문학. 선》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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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세상을 떠난 조미미가 부른 ‘눈물의 연평도’란 노래가 있다. “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태풍이 원수더냐 한 많은 사라호. 황천 간 그 얼굴 언제다시 만나보리. 해 저문 백사장에 그 모습 그리면 등대불만 깜박이네, 눈물의 연평도” 이 구슬픈 가사의 노래는 원래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희생된 조기잡이 어부들을 추모하는 노래로 최숙자란 가수가 먼저 불렸다.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된 1964년 무렵만 해도 연평도 근해는 조기가 지천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바다에 바가지를 담그면 조기 반 물 반이 떠올라온다. 1960년대 후반까지 연평바다는 조기를 잡으러 온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뤘다. 배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波市)’가 섰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바다시장이 파시다. 생필품 파는 상점은 물론 파시엔 ‘홍등’이 내걸린 색주가들이 쫙 들어선다. 한창 땐 백 곳이 넘었고, ‘물새’라 불리던 작부들도 5백여 명이나 몰렸다.
흥청망청 영원할 것 같던 연평의 황금시대도 어느 순간 종말을 맞이했다. 그 많던 조기 떼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미미가 ‘눈물의 연평도’를 리바이벌하여 부른 1970년부터다. 비슷한 시기 전라도 영광의 칠산 바다에도 조기가 사라졌다. 오랜 세월 대규모 선단이 어린새끼들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였다. 무차별 포획이 계속되자 멸종의 위험을 감지한 조기떼는 더 이상 사지로 몰려다니지 않고 바다 깊숙이 숨어버렸던 것이다. 연평도를 찾는 어선도 상인도 물새도 사라져 등대는 불을 깜박이지 못하고 녹슬어갔다.
파시는 끝났다. 그로부터 4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연평에 조기떼가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신 군사적 긴장이 상존한 가운데 꽃게어장만 부분적으로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연평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127Km, 쾌속선으로 두 시간 반 거리다. 오히려 북녘 땅인 해주까지가 30Km밖에 안 된다. 생애 단 한번 어쩌다 내가 이곳을 찾았던 게 꼭 40년 전이다. 딱 이틀 묵은 곳이라 ‘곰삭은 추억’ 따위는 있을 건덕지가 없다. 하지만 시인의 경우는 경북 영주 출생이긴 하나 대학을 나와 줄곧 인천권에서 교편생활을 한 이력으로 미뤄 짐작하면 연평과의 각별한 마음의 거리가 있을 법하다. ‘허공을 유목하는 가마우지’와 함께 ‘거대한 설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권순진
해변의 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