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멍게, 멍게 / 고형렬
오선민
2013. 9. 14. 08:08
멍게, 멍게
고형렬
가장 먼 발바닥부터 바람을 불어넣고
비벼대자 벌겋게 부어올랐다
다리가 팔이 없어지고 척추가 사라졌다
마지막 눈과 코가 지워진 채
장님 무아는 거기 서 있다
비닐의 손바닥만 남아 배꼽이 되었다
그리고 욕망만 제대로 부풀어올라
우주가 되고 가장 어둡고 높은 곳에서
대뇌피질이 되었다
욕망은 부풀었다 꺼질 뿐
터지지 않고 찢어지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는다 진화를 마쳤기 때문에
진화하지도 않는다
서서히 눈과 다리가 생기고 있다
나는 그 이름을 멍게, 멍게라고 부른다
—《시인수첩》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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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청봉 수박밭』 『밤 미시령』『붕새』『유리체를 통과하다』『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