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 정호승
'좋은 시·아름다운 세상' 『詩하늘』詩편지
종착역
정호승
종착역에 내리면 술집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푸른 술집이 있다
술집의 벽에는
고래 한 마리 수평선 위로 치솟아오른다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종착역이 출발역이 되기를 평생 기다린다
나는 가방을 들고 기차에서 내려
술집의 벽에 그려진 향유고래와 술을 마신다
매일 죽는 게 사는 것이라고
필요한 것은 하고 원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고래가 잔을 건넬 때마다 술에 취한다
풀잎 끝에 앉아 있어야 아침이슬이 아름답듯이
고래 한 마리 수평선 끝으로 치솟아올라야
바다가 아름답듯이
기차도 종착역에 도착해야 아름답다
사람도 종착역에 내려야 아름답다
ㅡ출처 : 시집『여행』(창비, 2013)
ㅡ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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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에 내리면 우선 마음이 푸근해진다.
마침내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있지만
밤빛을 따라 여기저기 돌아보며
야경도 즐기고 포장마차에도 들를 수 있고
사람 사는 모습을 크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이 어디여서가 아니라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면 된다
그 옛날 함께 숨 쉬었던 그 공기라면
그보다 반가울 수 없겠지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
사는 동안 어울려야 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 고향 언저리 정겨운 술집은 이제 없다
시간에 업혀 사라지고 없다
고래 아니라 꽁치 한 마리도 치솟아 오르지 않는
냉기 날리는 술집밖에 없다
돈 주면 어디든 술집은 많다
정을 나누는 그런 곳은 이제 없다
詩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