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이해와 감상 / 양승준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초례청 : 혼인 예식을 치르는 곳.
(시집 <52인 시집>, 1967)
이 시는, 우리 역사의 혁명적 사건 속에 허위적인 것이나 겉치레는 사라지고, 순수한 마음과 순결함만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한 시어를 반복 구사함으로써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 한편, 행간(行間) 걸림의 수법이나 쉼표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시상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화자가 없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은 ‘껍데기’이다. 그런데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쇠붙이’ 하나만을 화두(話頭)처럼 던져 놓고 있을 뿐,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쇠붙이’와, 그와 상반되는 어휘들의 의미를 통해 그것을 추론해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4월 혁명의 ‘알맹이’, 동학 혁명의 ‘아우성’, 혼례청에서 맞절하는 아사달 아사녀의 ‘부끄러움’, ‘향그러운 흙가슴’ 등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이 작품에서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4월 혁명의 민주화 열망이 퇴색해 가고, 동학 혁명의 민중적 열망도 소진되어 가고 있는 현실적 여건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또한, 시인은 부끄러움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원시인 같은 순수한 마음의 회복과 그 같은 순수성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현실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다. 그런 화자에게 ‘껍데기’는 사라지기를 소망하는 대상일 뿐이지만, 17행 중 6행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껍데기는 현실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4월이나 동학의 본래 이념과는 다르게 변모해 있는 현실 상황에 대해 화자는 강력한 거부의 몸짓을 ‘껍데기는 가라’라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지막 연은 이런 상징적 의미를 가장 투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우리의 국토를 ‘한라에서 백두까지’라고 말함으로써 분단의 비극적 현실 상황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동서 냉전의 부산물로 시작된 분단의 비극이 결국은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거쳐 고착화되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한편,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민족적 과제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아울러 ‘모오든 쇠붙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인은 4월 혁명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은 참다운 의미의 ‘인간 세상’이 도래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다.
- 양승준 <한국현대시500선 - 이해와 감상> 상,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