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나의 새 外 9편 / 유승도

오선민 2014. 3. 31. 21:15

*유승도 시인 약력

-1960년 충남 서천의 바닷가 마을인 비인에서 태어남

-경기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나의 새」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현재 강원도 영월의 한 작은 산촌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지내며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마련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

-시집으로는『작은 침묵들을 위하여』,『일방적 사랑,』『수염 기르기,』『차가운 웃음』,『고향은 있다』가 있음

 

   나의 새

  -유승도

 

  내가 인간세계에서 승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듯이

  새의 세계에서 새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알고 싶다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저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 ······· 승도야

 

 

 

  침묵

  -유승도

 

  골바람 속에 내가 있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려하지 않았으므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골짜기 외딴집 툇마루에 앉아 한 아낙이 부쳐주는 파전과 호박전을 씹으며 산등성이 너머에서 십년 묵언에 들어가 있다는 한 사람을 생각했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 속에 내가 있었으므로 바람의 처음과 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유승도

 

나는 둥그런 산에 산다

나무와 밭으로 뒤덮인 산,

숲에서 나온 물줄기는 밭을 가로질러 산 아래 들판으로 흐른다

가끔은 구름이 내 오두막을 감싸기도 한다

 

내 산엔 산 같은 무덤들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도 산에 묻혔다

아버진 말이 없는 분이셨다

얼굴을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닌 노래를 잘 부르셨다고 한다

 

이제 출산 날이 다가온 아내의 배를 보니

무덤을 참 많이도 닮았다

 

 

 

 

가득하다

-유승도

 

산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개의 짖음도 흑염소의 울음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돌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날아가는 까치도 까치가 앉았던 살구나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밖으로 나서는, 아이의 목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하늘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금 내린 눈까지 지우며 눈이 내린다

 

 

 

  돼지 잡은 날

  -유승도

 

  고기를 씹으면 피비린내가 뇌로 퍼진다 내가 내려친 도끼머리에 머리를 맡고 쓰러지는 돼지, 칼로 멱을 찌르니 콸콸 쏟아지는 피, 그 피가 내 머리뼈 밖으로 흘러내린다

  푸푸 머리와 몸통 사이, 끊어진 기도를 통해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돼지의 거친 숨이 내 가슴으로 들어와 코로 입으로 뿜어져도 나는 고기를 씹는 입질만은 멈추지 않는다 쓰러지며 내지르던 소리 없는 날카로운 소리가 내 멱도 따겠다며 덤벼들어도 나는 입질을 멈출 생각이 없다

  나를 바라보던 째진 눈의 어두운 눈빛이 눈앞을 가릴수록 나는 고기를 씹는 입에 더욱 힘을 준다 피가 멈춘 뒤에도 더 살겠다며 퍼덕이던 다리와 출렁이던 엉덩이살의 움직임이 사그러들 무렵 한줄기 내놓던 오줌줄기가 내 생식기 주위에서 어른거리며 고기를 뱉으라 해도 나는 씹는다 간과 허파와 지라와 심장 그리고 두 눈 부릅뜬 채로 삶아진 머릿살까지 우적 우적 씹는다 네 발을 자르고 여섯 토막 낸 돼지의 몸뚱어리를 햇살이 아무리 밝게 비추고 있어도

  돼지를 잡아 고기를 먹는 날이면 술로 먼저 입을 헹궈도 돼지의 피비린내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그럴수록 나는 돼지고기를 씹는다 꾹꾹 씹어 삼킨다 

 

 

  

  절벽에 붙어선 산양을 보았다

  -유승도

 

  금방이라도 쓰러지며 덮칠 것 같은 절벽의 위세도 아랑곳하지 않고 흐르던 물이 하얀 속마음을 드러내며 얼어붙은 겨울의 한낮, 거무튀튀한 절벽의 중간 쯤, 볼록 튀어나온 암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산양을 보았다 뿔은 하늘을 찌르고 수염은 절벽 아래를 향해 내려뜨린 채 산양은 미동도 없이 서서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무엇하러 이 산중에 들어왔느냐

  한 발만 헛디뎌도 생명의 저 끝이 보이는 곳이 이곳인 줄 몰랐더냐

  나 또한 이 벼랑을 의지해서 목숨 한 가닥 붙이고 사느니,

  흐느끼지 말아라 

 

  나를 노려 이 벼랑으로 뛰어오르는 짐승이 있다면

  내 두 뿔을 치켜올리며 그 짐승과 함께 낭떠러지 아래 저 계곡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해도 무릎 꿇지 않으리

  목을 물려 끌려가지 않으리

 

  네가 왜 나를 바라보고 섰느냐

  얻으려 하지 말고 살아라

  차가운 마음으로 살아라

 

 

 

  뜨거워라, 봄

  -유승도

 

  포도밭에 가서 전지를 하고 있는데 아들이 뭔가 들고 뛰어온다

  아빠, 이거 내가 만들었는데 먹어봐

  꼼지락꼼지락 빵이며 과자 같은 걸 만들어 먹길 좋아하는 아들이 또 과자를 만들었다

  어이구, 맛있는데!

  내 말에 신이 난 아들이 통통 튀며 집으로 들어간다

 

  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나눠준 급식 빵을 집에 가져가 텃밭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나눠먹던 그때가 아들의 뒷모습에서 번져나온다 앞산까지 다가와 있던 봄날이 갑자기 밀려들며 뜨겁다

 

 

 

  가난한 세월

  -유승도

 

  뻐꾹 뻐꾹 뻐꾹

  정부지원금을 아껴 장례비용을 모으던 회관 할머니가 죽은 지도 삼 년이 흘렀다

  뻐꾹 뻐꾹 뻐꾹

  마을의 유일한 처녀였던 향미는 아이가 딸린 홀아비의 유혹에 넘어가 떠나고

  뻐꾹 뻐꾹 뻐꾹

  젊어서 허리를 다쳤으나 돈이 없어 육십이 넘도록 기역자로 허리를 굽힌 채 살아왔던 꼬부랑 할머니도 할아버지만 남긴 채 땅 속 집으로 갔다

  뻐꾹 뻐꾹 뻐꾹

  몇 년 만에 찾아온 형님의 머리는 그새 반백이 되었고

  뻐꾹 뻐꾹 뻐꾹

  둥개둥개 안아 재우던 아이의 키가 내 목에 닿는다

 

  내가 내 아들만할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때 울던 뻐꾸기 소리가 뻐꾹 뻐꾹 뻐꾹 지금도 들려온다

 

 

 

  석양

  -유승도

 

  바라라라라라라

  열점박이무당벌레의 교미가 포도 잎 위에서 저녁 햇살을 받으며 이어지고 있다 암컷 위에 올라탄 수컷의 떨림이 끝나기 전에 잎의 한쪽을 접어 올려 두 마리 무당벌레를 감싸서 손가락으로 누른다

  너희들은 그래도 가장 좋은 순간에 죽으니 복 받은 거다

  축복을 보내며 어디 다른 놈이 또 있나 시선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벌레를 찾는다

  하늘에 번지는 석양을 나는 구태여 바라보지 않는다 벌레를 죽이는 내 모습이 곧 석양이니 

 

 

 

  빙하기 7

  -개

  -유승도

 

  사람의 머리가죽을 벗겨 옷을 해 입은 우리는 오늘도 거리를 활보한다 휴일도 밤낮도 없이 돌아다닌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아이들과 여자들을 찾으면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뒤쫓아 으슥한 곳에 들어서는 즉시 달려들어 산 채로 뼈까지 ‘쩝쩝’이다

  사람 하나 잡아먹으면 배가 불러 잠에 들던 선조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우리는 먹는 즉시 소화시키는 능력을 갖췄다 맛있는 먹이가 널렸는데 어찌 배부르다 눕겠느냐 다만 사람들이 우리가 개임을 알아채지 못하게 조심해야 함을 알고 있다 달아나 꽁꽁 숨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무장을 하고 대들지 않게 야금야금 잡아먹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이빨이 드러나지 않게 입을 다물고 꼬리도 옷 속으로 꼭꼭 숨기고, 힘겨운 일이지만 눈웃음도 억지로 만들어 보여줘야 한다

  한다고 했지만 우리의 본 모습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들 어떤가 이미 우리의 세상이다 철판을 뚫는 이빨을 어떤 사람이 막으랴 주인인들 먹지 못 하랴

 

  우우우우− 워워워웡∼ 커어커어, 이야호 뛰어라 먹어라 인간의 피로 만든 술을 마시며 오늘을 즐기자 짖어라 우리는 개다 세상은 우리 것, 끼야호 춤 춰라 유방 안주가 떨어졌냐 저기 저 년 잡아와라 마셔라 마셔 개의 세상이다 하늘 아래 사람 위에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