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묻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 이은봉
'좋은 시·아름다운 세상' 『詩하늘』詩편지
때 묻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이은봉
늦은 밤이다 서둘러 때 묻은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베개는 아내의 젖가슴처럼 뭉클하다
낮 동안 들뜬 가슴, 밤 깊어도 가라앉지 않는다 귓속에서 심장 뛰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
아내의 허벅지처럼 푸근한 베개라니!
혼자서 잠 청한 지 벌써 몇 해인가 괜한 질문하지 않기로 한다
질문해 무엇하랴 아직도 한 줌 양식 찾아 객지를 떠돌며 살고 있거늘!
낮 동안 움츠러든 마음, 쉽게 펴지지 않는다 창밖 환해지도록 눈망울 벌겋게 붓는다.
ㅡ출처 : 시집 『첫눈 아침』(푸른사상사, 2010)
ㅡ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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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생활에서 가지는 아픈 이야기다
나도 그랬다
첩첩 산중에서 1년 반을 지내봤는데
밤 건너기가 무척 힘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럴 때 내가 했던 게 묵주의 기도였는데
별 탈 없이 이곳으로 오게 만든 힘이 되었지 싶다
가족과 헤어져 지내는 쓸쓸함이 오죽하겠나
잠을 청하기 위해 얼굴을 묻은 베개지만
아내의 젖가슴처럼 뭉클하다느니
아내의 허벅지처럼 푸근하다느니 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잠들지 못하는 베개로 찾아오는
가족의 얼굴들이 어른거리면
창밖이 훤해지도록 잠들지 못해 눈만 벌겋게 부어
공연히 가슴만 아프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가족이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나의 노고로 따뜻하게 지낼 가족을 생각하면
쓸쓸함은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서로 그리워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詩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