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스크랩] 콩나물에 대한 예의/ 복효근

오선민 2015. 3. 16. 16:34

 

 

 

콩나물에 대한 예의/ 복효근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 시집『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문학과경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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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식당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살림을 도맡아 사는 형편도 아닌 것 같은데 콩나물 다듬는 일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럴 때 그저 아랫도리는 손톱으로 쥐어뜯고 윗대가리는 쑥 훑어 날려버리면 될 것을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의 발동으로 콩나물의 뿌리를 선뜻 자르지 못해 멈칫거리고, 대가리를 날리는 참수형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아 손이 오그라든단 말인가. 이렇듯 콩나물의 형상과 습성을 두고 시적 사유를 펼친 시인들이 여럿 있다. 콩나물 대가리 하나도 시인에겐 훌륭한 시적 관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콩나물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에 놀란 삶이기에 노랗게 질린 얼굴이냐고, 얼마나 생각이 많은 삶이기에 무거운 머리를 이고 있냐고, 온몸이 뿌리가 되어버리고도 어떤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저토록 힘든 모습이냐고, 얼마나 지독한 사랑을 앓았기에 허연 뱃속까지 드러내고,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일생 고개를 들지 못하느냐고. 임영석 시인은 '물만 먹고 사는 몸이니 희쭉 웃으면 가벼워 보이고 활짝 웃으면 헤퍼 보인'다며 그 성정으로 '설익으면 비린내 나고 너무 푹 익으면 씹는 맛이 없'다고 했다. 

 

 콩나물은 콩에다가 다른 일체의 영양소 공급 없이 그저 물만 주어 키운다. 그것도 어두운 곳에 가두고선 보자기를 덮어 씌어 고문을 가하듯 무슨 형벌인 듯 키우는데, ‘죄 없는 콩알들을’ 이리 막 대해도 좋을지 시인은 난감해한다. 그리고 시인은 가난했던 시절의 콩나물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마구 떠올랐던 것이다. 마치 갱죽 속의 밥알과 콩나물의 관계마냥 끈적끈적하다. ‘결핍과 슬픔’의 은유처럼 생각되었던 콩나물과의 동거를 추억하는 것은 꽤나 ‘넝마 같은 낭만’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예나지금이나 콩나물은 여전히 서민의 범용 재료이긴 하지만 알려진 성분의 효험은 장뇌산삼 수준이다. 콩나물은 암 예방에서부터 성인병인 고혈압, 동맥경화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동의보감에도 '콩나물은 온몸이 무겁고 저리거나 근육과 뼈가 아플 때 치료되고 제반 염증소견을 억제하는 효과가 뛰어나다'고 기록되었다. 감기와 숙취 해소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며, 피부미용에 좋을 뿐 아니라 머리를 좋게 하는 물질까지 들어있다니 물끄러미 보자면 올챙이와 생김새가 닮아 올챙이시절 낭만을 떠올렸다 해도 무방하겠다. 

 

 다만 그 기형의 변종에게 예의는 차릴 생각이다. 바른대로 말하면 사실 콩나물은 콩으로서의 특성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모습이니 말이다. 그만큼 자연의 변형을 통해 편익을 취한 대가로 최소한의 합당한 품위는 갖추어야 온당하겠다. 그래서 슬픈 욕망 같은 대가리를 자르는 대신 추념의 손짓으로 슬그머니 그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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