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스크랩] 물가에서 우리는 / 이승희

오선민 2015. 8. 17. 13:01

물가에서 우리는

 

   이승희

 

 

 

발을 씻는다

버드나무처럼 길게 발가락을 내어 놓는다

세상의 모든 염려를 품고

울음을 참고 있는 나무들이 있어

오늘 당신과 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이 캄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 발이 물 속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눈이 없는 물고기처럼 당신의 손가락을 스친다

 

아제 더는 애쓰면서 살지말아요

어떻게든 사는 건

하지 말아요

 

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없었으므로

이제 나는 눈 없는 물고기로 살거나 죽거나

당신 옆에 눕고 싶은 것일 뿐

상처 가득한 지느러미가 환해질 때까지

달빛이나 축내면서

 

어떤 당부도 희미해진 지금

말간 물이 발목에서 뒤척이는 건

마치 어떤 전생 같아서

몽유의 날들을 세어 본다

세어 보는 손가락이 붉어져서

물가의 나무들은 속으로만 발가락을 키운다

 

 

                     —《현대시학》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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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7년에 《시와 사람》으로, 1999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서쪽’ 동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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