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감상

[스크랩]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외 1편)/ 이화영

오선민 2015. 8. 17. 13:59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외 1편)

 

   이화영

 

 

 

 

잎새의 무릎 위로 날아든 부고

술렁이던 숲

오래된 손톱을 세워

서둘러 간 젊은 호흡을 맹렬하게 움켜쥐었다

 

훗날의 맹세를 잊은 서늘한 이름이

이승의 저물녘 3악장을

섬 밖 풍경으로 연주한다

 

갓 핀 어린 것들의 얼굴이

지워지고 사라진다

지휘봉이 솟구칠 때마다 아득해지는 거리

한때 지척이었던,

 

몸을 부풀린 바람 동백 이마에 닿는다

이른 아침

물새의 맑은 첫 숨결

옆구리에 깊게 불어넣은 후였다

 

 

 

몸속의 사원

 

 

 

당신과의 인연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된 후

내 몸속에 사원이 생겼습니다

사원의 누각에 걸린 종(鐘)에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바느질하듯 정으로 새긴 형상입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생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한동안 버려두었던

종 채를 찾아 누각에 올라갑니다

당신의 음성이 종소리 되어 울려 퍼져 나간 자리마다

우묵한 우물이 파였습니다

우물이 찰박찰박 깊어질 때

벌레와 몸을 기댄 풀잎이 고요를 젖히며 일어납니다

당신이 사원을 나와 천천히 뒤편의 숲으로 들어가

바위에 엎드려 태아처럼 웅크립니다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몸은 신열이 올라

우물을 퍼 올려 마른 정수리에 끼얹습니다

당신이 내 태아인 듯 양수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영겁의 인연이라면 어느 전생에서는 내가 당신의

여식이거나 남편이기도 했을 겁니다

다가올 어느 사후에는 당신이 내 자식이기도 할 겁니다

그 사원은 내 자궁 안에 있습니다

사원과 몸을 바꾼 바람이 알려준 비밀입니다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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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 전북 군산 출생. 2009년《정신과 표현》으로 등단.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시집 『침향(沈香)』『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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