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미학적인 관점에서 시 읽기/정재영 시인 (2011년 2월호) 본문
<11-2월호 시월평>
미학적인 관점에서 시 읽기
정 재 영
(시인)
문학비평에는 다양한 방법론이 있다. 그 중 신비평(new criticism)은 그동안의 역사적인 방법론이나 작가의 전기적 방법론을 반대하고, 문학작품을 그 자체의 개별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그들은 말의 함축적이거나 연상적이거나 비유적인 기법을 중요시 한다. 따라서 상징, 은유, 이미지 등을 강조한다. 이것은 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선구적인 사람과 저서는 I. A. 리처즈의 〈문학비평의 원칙 Th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1924)과, 윌리엄 엠슨의 〈애매성의 7가지 유형 Seven Types of Ambiguity〉(1930)에서 기원을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학술적 용어를 갖게 된 것은 그것을 체계화한 존 크로 랜섬의 〈신비평 The New Criticism〉(1941)이 나오면서였다. 한국은 1950년 이후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시인들과 그 시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백철이나 송욱, 문덕수 등이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그 방법론을 가지고 비평가들은 작품을 분석할 때 형식, 언어 조직, 운율, 비유, 문체 등의 분야를 연구함으로 문학이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현재에도 형식주의 계통의 신비평은 작품의 내용이나 시인의 심리적 관찰이나 전기나 역사적 바탕 위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주관적인 비평방법론에서 벗어나 작품 안에서 개관적으로 예술성의 의미를 구현하고자 하는데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를 포함한 문학은 언어를 가지고 창작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시는 언어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언어’와 ‘예술’이라는 두 가지의 단어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밝힐 필요가 있다.
언어는 내용(의미)을 가지고 있는 소리다. 즉 사과라는 말은 ‘사’와 ‘과’라는 소리로 되어있다. 소위 기표이다. 그러나 그 뜻은 과일인 apple 이라는 것과 잘못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용서를 비는 apolgy 라고 말하는 두 가지로 사용된다. 그래서 사과를 드린다는 뜻은 과일을 준다는 말과 잘못을 빈다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기표와 기의가 서로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한 음성 안에선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경우가 더 많겠으나 이처럼 언어는 소리와 뜻이 다른 경우가 있다. 그래서 단순한 소리로 예술을 만드는 것을 음악이라고 한다. 노래는 시처럼 의미까지 있다. 이때 시를 시가(詩歌)라고 하여, 이 면을 강조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정형시인 시조가 그 속에 든다.
후자인 예술이라는 말이 현재처럼 사용된 것은 그리 길지 않는 역사를 가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가 영감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개념일 때, 조각이나 그림은 기술(테크네)라는 의미로 미적인 기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테크네가 라틴어 아르(ars)로 사용되다가 18세기에 와서야 영어의 아트(art)로 예술의 넓은 의미를 가지는 용어가 된다. 미술을 fine art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원칙적으로 미술이 순수한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 언어 안에 기술이라는 저변의식 속에는 아름다움(美)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시인이라는 언어도 제작이라는 포에시스(poesis)와 동일한 어원이 포에타이( poietai)다. 이 두 단어는 무엇을 ‘만들다’는 동사인 포이에인(poiein)에서 파생된 말이다.
현대시가 <의도된 기획물>이라는 의미와 아주 가까운 것은 그리스의 오래된 미학적 관점과 거의 비슷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미학(Aesthetics)이라는 말을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이 사용한 것도 18세기 중엽으로 지각(知覺)하다는 아이스타네스타이(aisthanesthai)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미의 본질과 예술의 원리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함에서 시작된 것이다. 바움가르텐이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인간의 감성적 능력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함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시를 통해서 감성적으로 파악한 ‘완전성’을 ‘미’로 규정하였다. 시나 예술은 이런 미를 추구하는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미란 예술에 대한 철학적인 의미다. “미”가 단순한 “아름답다(beauty)”라는 단어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서두에서 간단한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용어에 대한 한정적 의미를 통일하고자 함은, 시의 분석에 있어서 신비평 이후 현대 비평방법론은 미적 감동을 위하여 언어를 가지고 미적 예술성을 만들어 내는 미학적 기술(art)이라는 현대비평학의 토대 위에서 살핀다.
그럼 작품을 들어 앞선 비평론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아스팔트 위를 달린다 시속80
황혼의 짙은 입김이 녹아 내린다
순간 피와 날개가 엉켜 붙은 질감의 느낌
까만 노면의 체온과 비명의 가냘픈 숨결
멍청한 까치 였을까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백합나무 잎새와 햇살이 눈부시다
열매를 키우고 그들의 가족을 키운다
강물은 연신 갈증나는 돌발을 적신다
먼 산에 더 있는 구름
그 너머 쪽빛 하늘 조각
사이사이 뚫린 검은 띠의 끝자락
짓눌린 목숨의 헝겊같은 한 점의 반점
이승의 땅과 함께
바퀴 속에 묻힌다
- 최원규 「아스팔트와 까치」 전문
화자는 운전 중에 까치를 자동차로 치었다. 까치를 죽인 시인의 정서를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새 한 마리가 가지는 단순함의 의미와 화자의 철학이고 미적인 의식의 연결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의식, 즉 존재라는 거대 담론을 말하고 있다. 2연의 까만 아스팔트 위에서 죽은 가벼운 존재와는 달리 3연의 그런 운명의 현상 앞에서 무관한 듯 서 있는 주위인 가로수는 여전히 열매를 맺고 가족들을 건사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화자는 한 생명의 죽음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다른 존재의 태도에서 죽음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어진 4연에서는 하늘과 구름을 배경화하여 죽음 앞에서 ‘검은 띠’로 표현하고 있는 죽음의 아픔을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다. 시에서 제시하는 하늘이 가지는 의미다.
여기서 죽음을 다루는 두 사물의 차이를 발견한다. 땅의 가로수와 하늘의 구름 조각이다. 죽음 앞에서 가로수는 살아가야 하고 그 죽음은 하늘의 관심으로 그려낸다. 이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함축하여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죽음의 당사자는 바퀴 속에 묻히는 모습으로 인간이 죽음 후에 땅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
까치 한 마리의 죽음 통해서 화자는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가벼운 존재의식과 동시에 하늘의 모습을 통해서 미래세계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죽 허무와 영원에 대한 의식을 양극화된 이미지를 동원하여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 생명이 가지는 존재가치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전제한 시가 가지는 ‘제작’이라는 예술성이 바로 이런 은유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이다. 만일 과학적 진술어를 통한 것과 까치의 죽음을 통하여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은 언어가 가지는 내용상으로는 동일할 수 있어도 미적 감동으로는 차이가 있음을 위시가 분명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시가 의도적으로 만드는 언어예술이라면 까치라는 새도 의도적으로 동원된 시인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종종 차에 치어 죽은 짐승이 들고양이나 주인을 잃은 개나, 봄철에 자주 나타나는 개구리 등을 비롯한 다양한 야생 짐승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까치라는 새는 우리의 원형심상에 좋은 소식을 주는 상서로운 조류로 인식되어 있다. 그런 원형을 통해서 까치의 죽음은 아스팔트와 하늘의 검은색과 흰색의 배색을 전경화 시킨 의도와 함께 더욱 아픔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려 하려는 숨겨진 뜻도 있다.
이제 다른 계절이다
지금보다 더 어두운 김 밤이 온다
드디어 시린 손으로 시를 써야 한다.
겨울이 없는데 어찌 봄이 오겠는가
희망이란 겨울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 알 씨앗도 깊이 잠들게 하라
- 김석규 「입동」 전문
위 예시를 위시하여 김석규 시인의 작품은 모두 절기에 바탕을 둔 시제를 가지고 있다. 「월동을 위하여」, 「겨울 밤」, 「눈 오는 밤」, 을 제외한 다른 한 편은 「가을 소곡」이다. 모두 계절에서 시상을 빌리고 있다.
이것은 화자가 단순한 절기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절기가 상징화된 언어 속에 암시성을 품도록 하려 함이다. 왜냐면 통상적으로 같은 언어를 반복하여 시어로 사용함은 대부분 상징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 제목의 입동은 단순한 절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입동이란 겨울의 시작이고, 겨울은 추운 고통과 암흑의 시대를 말하고 있다. 화자가 말하는 입동은 시대상이거나 존재상황을 철학적으로 보여주려 함이다. 개인적으로는 노년의 말년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틀림없다. 겨울에 봄날 한 알의 씨앗을 ‘잠들게’ 하듯 시인은 희망을 위해 시정신을 보관한다는 것인데, 그 말은 곧 시인이 고난의 기간에서도 시를 계속 씀으로 시의 생명을 씨앗처럼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도 예술가의 정신을 가지고 꾸준한 노력에서 곧 씨앗이 가지는 봄의 희망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봄에 싹이 틀지라고 생명은 그 겨울에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관념적인 계절을 입동이라는 절기로 바꾸어 말하는 것을 변용을 통한 작업이라 한다. 이런 비유나 상징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미학성이라는 의도에 서론을 길게 말했던 것이다. 즉 이것은 시인의 천재성에 의한 것이 아닌 제작성의 능력의 우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이 제작성이 곧 예술의 토대인 것이다.
다음은 신년시조특집에 발표된 작품을 읽어본다.
오래된 보일러가 손을 턴 겨울 너머
한데 겨우 면하고 봄 채비 나선 꽃분
홍조 띤 햇살 넌출 아래
어깨죽지 앙상하다
무릎 수술하신 후에 걸음 걸음 절룩이며
꺽은 꽃대 앞을 진종일 어르시는
아버지 젖은 눈자위
노을 꽃이 핍니다.
-고동우 「아버지」전문
정형시인 시조는 외형적인 음률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우리말의 음률의 여러 종류 중 음보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어의 장단이나 강약(액센트)이 우리말에서는 특별히 구분되어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 음률 구성이 음보률에 많이 의탁한다.
그러나 ‘만들어 낸다’는 의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음률과 함께 이미지의 동원에서 보면 현대시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단순히 글자 수만 통일한다면 노래 가사에 지나지 않는다. 시조가 음운을 중요시 한다 하더라고 분명히 시가 가지는 미학적인 상징과 의미를 통한 비유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왜냐면 시조도 시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내용을 직접 드러내어 글자 수만 맞추었다면 그것은 산문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그런 전제로 ‘아버지’는 의미가 은폐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술이라는 행위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제작물이기 때문이다.
첫행 ‘오래된 보일러’에서 이 사물은 곧 아버지와 등가성을 가진 의미망이다. 인간을 체온을 가진 사물로 볼 때 당연히 보일러로 비유할 수 있음이다. 객관적으로 매우 절절한 비유다.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이 되는 것이다. 첫연에서 아버지는 겨울철이 지난 봄철의 보일러로 사용의 기능성이 절기적으로 소용성이 없는 것을 뜻하고 있다. 마치 옛시에 나이가 지나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않는 여인을 추선(秋扇)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가을에는 부채를 쓸모없는 관심 밖의 물건인 것처럼, 늙은 아버지를 봄철에는 용도가 폐기되는 보일러로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시조가 단순한 외형적인 운율에 의하지 않고 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동원함으로 문학적인 용어인 기발한 착상(기상conceit)이 되는 것이다. 이 기상에서 이 작품의 미학성이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다.
2연에서는 더욱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보일러 옆에 다른 이미지를 병치시켜 더욱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한데 겨우 면하고 봄 채비 나선 꽃분// 홍조 띤 햇살 넌출 아래/ 어깨죽지 앙상하다
여기서 1연과 2연을 이미지로 묶어 보이러 옆에 겨울 난 봄 채비를 하는 꽃분을 철 지난 보일러와 같은 이미지로 동원하여 꽃분의 앙상한 어깨죽지로 표현함으로 아버지가 가지는 심상을 그림처럼 드러내 구상성을 가지게 해주고 있다. 소위 원관념의 전경화요, 관념의 시각화인 것이다.
더욱이 이 작품이 성공적인 것은 그 이미지인 대상을 시적 자아와 연결한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눈자위에 노을 꽃이 핀다는 것은 사물과 화자의 정서는 동일성을 가지게 되는 설득을 가진다. 노을꽃이라는 조어에 의탁하여 화자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고동우 시인의 다른 작품 중 「다향(茶香)의 고삐잡고」에서도 이미지의 구상이 매우 뛰어난 이미지를 발견한다. ‘깍지푼 잔설’, ‘얼비친 하늘 한 잔’,‘실밥 터진 생의 옷깃’ 등은 일상의 언어가 아닌 시인이 의도적으로 만든 ‘테크네’를 구사한 언어를 통해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미학성을 가진다. 그래서 이런 작품이 미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는 것이며, 이미지를 동원한다는 것은 곧 비유를 만드는 예술작업이라는 것이다.
풍시조도 언어의 창조성에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난 1월호 시월평에 평자의 소견을 밝힌바 있다. 3행이라는 풍자의 시도도 그런 면에서 같은 예술적 언어 구사가 의도적으로 내용에 앞서 행하여야 한다.
해마다 12월이면 뭐가 그리 잊을게 많은지
모여서 기억을 지우는지 세월을 지우는지
잊기는 잊는 모양이야 작년에 모이고 또 모이니
-서봉교 「망년회」 전문
읽는 사람으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시대적 문화비평을 한 좋은 작품이다.
첫행에서 보여주는 의도는 망년회의 보편적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행에서는 그 문화가 가지는 상실된 의미를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한걸음 나아가 3행의 결어부분에서 구사한 역설과 아이러니의 언어는 긍정을 통한 부정으로, 이 풍자시가 뛰어난 시대상의 비판을 촌철살인 하듯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연말의 의례적인 망년회를 통해 다시 잊어 할 것과 세월이 가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숨겨 놓은 것을 알게 된다.
잊어야 할 내용은 사람마다 각자 다를 것이기에 이 시처럼 굳이 표출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세월과 함께 버리고, 고치려고 행하는, 잊음의 망년이 아니라 치매성의 건망증을 말함으로 망년회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세대의 모습을 해학성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지난 망년회 때에 각오한 잊자고 한 것 까지 한 해 동안 여전히 잊지 못 하고 있는 것을 말함으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잊음의 의미를 찾자는 의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망년회는 이름뿐인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학적 비판은 이 풍시조처럼 역설과 아이러니 기법을 동원할 때 생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등장하지만, 현대문학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기법의 하나다. 이 풍자시가 그 기법을 사용함으로 읽는 사람의 가슴에 와 닿는 마음의 움직임이 매우 크다는 것이 이 작품이 그 이론의 실제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기억을 지우듯이 세월도 지운다는 표현은 세월도 사람이 의도적으로 지울 수 있다는 효과적인 언어유희를 통해 이 시가 한층 깊은 미학성을 가진다.
지난 호에서 평자가 강조했듯이 풍자시도 시의 장르의 하나다. 그렇다면 시의 미학성을 이루는 기법에 대하여 무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는 것은 문학적 기법을 동원할 때 비로소 미학적 감동을 주는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 풍자시가 극명하게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 글 초두에 서술한 비평학의 간단한 관찰을 통해, 시란 언어예술로, 현대에서 사용되는 예술(art)이란 말은 테크네라는 어원의 유래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따라서 현대시를 정의하는 용어 중 하나인 ‘의도된 기획물’이라는 언어기술의 시각으로 『조선문학』 지난 호에 발표된 시들을 읽어봤다. 그 결과 시의 미학성은 언어의 의도된 제작성에서 미학성이 의존된다는 것을 발표된 시들을 통하여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작품이 가지는 미학성에 대해서 탐구하는 비평가의 눈도 시작품을 언어예술작품이라는 언어의 정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변해 본다.
<월간조선문학 2011년 2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