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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비행운(飛行雲) / 함기석 본문

좋은 시 감상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 함기석

오선민 2012. 8. 22. 11:52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함기석

 

 

아픈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본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하늘엔 어두운 핏줄만 뻗어가고

내가 가꿔온 꿈이 사마귀처럼 사각사각

내 내장을 파먹고 아이의 웃음을 파먹고 있다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싹튼 상추들이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보인다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 돼지가 되고 싶은 날이다

대문가 목발을 짚고 올라온 어린 나팔꽃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저녁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 서녘하늘 전체가 붉은 갯벌로 변해가고

벼랑이 보이는 해안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햇살 하나가 가만히 다가와 아이의 상처 난 뺨을 혀로 핥아준다

흰 이가 막 돋아난 햇살의 빨간 잇몸

공기들이 만드는 투명한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고

아이는 약에 취해 잠든다

나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놀이터 모래밭을 바라본다

아침부터 온종일 허공을 날다 저녁에

모래밭에 떨어져 죽은 새

새가 남긴 마지막 무늬와 추상의 발자국들이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이다

나는 잠든 아이를 꼭 안고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점점 붉게 지쳐가는 하늘과 대지

저 두 장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검붉은 침묵들

거미의 입으로 들어간 벌레와 빗방울과 어둠이

환한 허공의 집이 되기까지

삶의 습한 저지대를 비행하는 아픈 비행운들

멀리서 석양에 젖은 새들이 하늘을 돌고

나무의 흔들이 죽은 나뭇가지 끝에서 빠져나와 찬 물결처럼 고요히

허공 저편으로 퍼져가는 것이 보인다

 

 

—《애지》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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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오렌지 기하학』『뽈랑공원』『착란의 돌』『국어선생은 달팽이』, 동시집 『숫자벌레』, 동화집 『상상력학교』『코도둑 비밀탐정대』『야호 수학이 좋아졌다』『황금비 수학동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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