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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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2012년 하반기 《현대시》신인상 당선작 _ 윤성아

오선민 2013. 1. 2. 14:09

2012년 하반기 《현대시》신인상 당선작 _ 윤성아

 

                                              

  후천적 왼손잡이* (외 4편)

 

    윤성아

 

 

 

   *후천적 왼손잡이 : 나의 오른팔에는 덮개가 존재한다네. 뚜껑은 아니라서 열 수는 없네. 숨은 것들을 폭로한 적 없네. 그러나 흥분할수록 덮개는 수축하는 법. 그럴수록 숨은 것들은 압축되어 단단해지네. 덮개는 왼쪽으로 이동하네. 그대가 오른쪽으로 당긴다면 나는 고통의 나르시시즘을 느끼네. 자전하는 살갗은 지구보다 수천 년을 앞서 어느 자리에 머물고 있네. 그대가 오른쪽 막다른 길로 끌고가던 날 나 덮개 속으로 투신했네. 너무 밝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네. 어디선가 汽笛처럼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우왁. 나는 물집처럼 울음이 터졌고 어른을 사냥하는 아이들을 상상했네. 촉감으로 느꼈을 뿐. 나는 압축되었고, 나는 귀여워졌네. 그대가 나를 부르자 덮개는 나를 바깥으로 퉁겼네. 잠시 공중에서 나 지구와 함께 돌았네. 어지럽게 치환되던 점막들이 제 자리를 찾고 나는 그대에게 착상되었네. 그대의 통점을 찾았으나 나의 살갗이 먼저 아팠네. 보편적으로 긁적였지만 그대는 나를 의심했네. 태어나지 못한 씨앗. 씨앗이 전해 준 고통으로 그대를 얻고 싶은 손가락들. 오른쪽으로 굽어지기 위해 스스로 몸을 꺾는 꽃대들. 꽃대들을 따라 허리를 굽히네. 어느새 내려앉은 나의 덮개. 여러 겹 덮개를 베어낼 때마다 오, 나의 예쁜 나르시시즘.

 

 

 

火傷

 

 

 

자전하는 지구에 대해 골몰한 적 있다.

걷어찬 흙들이 나열된 방식으로 뿌려졌던 날

모든 것은 이동하고 있었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러지는 나무들은 한데 모여 있었고

지진은 없었다.

분명 나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는 사실

공기는 끓었고

 

최초로 본 문양은

태극 무늬였다.

빨강과 파랑은 우울했으며

당연하게도, 자전하고 있었다.

 

                                     *

 

소멸한 기억에 대해 그녀는 기록처럼 말하곤 했다.

세계 지도를 볼 때마다

이동하는 나의 오른쪽에 대해 말했으며

사실적으로 자전하는 지구본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가끔씩 모호한 눈물로

 

                                     *

 

내 오른쪽 지도를 발견하던 날

자전하던 살갗. 정지할 수만 있다면

 

나는 탐험가였으며 최초의 자국을

남기기 위해 떠나야 했다.

 

수축하는 나라

낯선 문양의 나라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들은

의심 없이 이동한다.

미세하기 보다는 어떤 나열된

방식으로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내가 진화할수록

살갗의 자전은 계속되고

문양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나는,

떠나야 한다.

 

 

 

  즐거운 나의 집

 

 

 

   나는 헬기장에서 썩은 아카시아 나무와 놀고 있다. 나무와 나 사이의 고무줄.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나무와 고무줄 사이로 둥둥 뛰어다닌 날. 고무줄 밟던 날. 선을 그었다. 할머니도 둥둥.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할머니와 나와 고무줄 놀이. 할머니는 썩은 나무 천장과 고무줄 사이. 할머니는 늙어서 둥둥 올라타고. 좀 내려오시지. 둥둥 할머니 공중에 너무 오래 매달렸나 봐. 동강동강 아빠는 저쪽에서 부엌칼로 요리 중이던 느낌. 동강동강 도마 위를 가뿐히 뛰고 있는 칼. 은빛 칼이 붉게 변할 때까지. 아빠는 선을 만들고. 도마는 썩지 않는다. 내일은 어제의 아빠에게서 칼을 건네받은 엄마가 있다. 손등 위에 재료를 얹고 선을 만들지. 밟고 밟고 동강동강 피어오르는 주르륵. 나는 주르륵 흐르지 않아.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

 

   나무의 힘을 믿는 할머니.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던지면서. 주르륵. 좀 내려오시지. 둥둥 할머니 옆에서 엄마에게 칼을 선물한 아빠. 아빠 식대로라면 낭만적인 연출. 엄마는 야만인처럼 도마를 꺼내고. 무드 없어. 그럴 땐 차라리 고무줄을 밟아줘 엄마. 아빠의 두 번째 선물은 사선. 예쁘게 길다. 할머니 둥둥 한쪽으로 기울고. 엄마, 손을 뒤집고 예쁜 직선. 엄마는 손과 팔을 구분할 줄 알아. 엄마 식대로라면 낭만적인 연출.

 

   컷!

 

   즐거운 나의 집

 

 

 

  날짜변경선

 

 

 

   어제는 그녀와 슬픈 섹스를 했다. 감탄사가 없는 리액션. 우우, 아침이 왔던가. 나는 깨어나고 천장 거울 그녀와 나의 나체가 원근법으로. 원근법에서 모자이크로. 나는 일어나 문을 열었던가. 건물 앞 삼거리 빨간 신호가 오늘의 아침을 알릴 것이다.

 

   편의점 남녀는 교대중이던데.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어제의 잠을 자고 있다.

 

   가끔 파랑과 초록을 혼동하는 멍청한 여자들을 생각해. 그들과 그녀는 다르지. 그녀는 분명한 나체로 어제의 잠을 자고 있어. 초록을 가지지 못해 지루한 것처럼. 파랑의 밤을 건너 온 발바닥처럼.

 

   오늘의 첫마디를 저기, 라 말해볼까. 저기, 어제의 밤은 다시 올까?

 

   밤을 다녀온 별들이 떨어진 위치에서 무언가 타버린 흔적을 발견했지.

 

   오늘의 아침을 모두 소멸하고도 나는 첫마디밖에 내뱉지 못했다. 이제 오늘의 잠을 자야 한다. 그녀는 곧 깨어나고. 건물 앞 삼거리 초록 신호가 오늘의 밤을 알릴 것이다.

 

   편의점 남녀는 교대중이던데.

 

   우우, 감탄사도 없이 슬픈 리액션. 나는 잠들고. 천장 거울 속 그녀와 나의 나체는 모자이크로. 모자이크에서 원근법으로. 그녀가 깨어나 문을 연다면.

 

 

 

  急時雨

 

 

 

   사라진 7번 국도에서 발견된 사내. 시간이 역류했을 때 음모 없는 촉감이 풍겼다. 나는 중앙선이 조금 더 분명한 지점에서 왼발을 들었다. 음모 없는 남자와 섹스하고 싶은 건 욕정이라기보다 비극에 가까웠다. 어떤 허구도 없었으면.

 

   사내는 폭식한 개처럼 무겁게 걸어왔다. 7번 국도는 정말 사라졌다. 나는 왼발을 공중에 띄웠고 바닥과 왼발 사이의 부재는 진실했다.

 

   그동안 규칙적으로 뿜던 피들은 순수했다. 응고된 기억들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비는 내릴 것이다. 정해진 목록이었다. 구경꾼들은 달리고 있었지만 간헐적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고갈되었는데도 옹알이는 계속되고. 나는 사내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오른발로 바꿀 때가 되었지만 고통은 반동하며 사라졌다.

 

   어떤 형용을 내뱉어도, 모자이크

 

   나는 발작이었고 소용없었고 추상이었다. 사라진 것 위로는 없어진 것들이 나타나고 사내는 확신할 수 없었다, 비밀처럼. 역류했던 것들이 다시 역류하면 때가 온 것이다. 왼발을 들고서 모자이크는 사내에게로 퉁겨갔을까. 나는 제자리 뛰기만

 

 

 

————

윤성아 / 1989년 경기도 연천 출생.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주소 : 경기도 동두천시 상패동.   dreamer_sa@daum.net

 

 

 

選後感 】///////////////////////////////////////////////////////////////////////////////////////////////////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말들이 시단 곳곳에서 들려온다. 더욱 공정하고 가능성 있는 당선자를 내기 위해 노력하자는 다짐으로 심사가 시작되었다. 이번 공모에는 약 150여 분들이 응모를 해왔다. 예년에 비해 응모자 수가 100여 명 이상이 줄었으나 응모작들의 수준은 훨씬 높아져 아연 긴장했다. 비교적 연령이 적은 신인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인지, 젊은 응모자들의 수가 대폭 늘었다. 예심을 거쳐 일곱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본심에 오른 분들은 김호성, 민정하, 서종현, 성해경, 윤성아, 이영재, 장보미 씨였다. 이 중에서 심사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이영재, 장보미 씨가 먼저 제외되었다. 나머지 다섯 명의 응모자들을 대상으로 토론을 이어갔다.

   이번 신인상을 심사하면서 두 가지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결국 당선자를 내지 못한 지난 봄의 응모작들에 비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높았다는 점이다. 이는 하늘이 높아지는 철이 시심을 움직이기 때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현대시 신인상에 거는 기대가 제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연의 힘을 배제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이만하면 얼마나 반가운 우연이랴.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을 읽으며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대체로 작품들이 진술보다 구성의 힘에 기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 구성이 필연성을 지니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못하고 다소 두뇌적인 작품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그리고 세 번째로, 구성의 힘에 기대는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데 있어 창의적 역량이 발휘된 시와 구성의 노력에 버금가지 못하는 이미지 생산력을 보여주는 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종현씨 작품의 장점은 문장에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정적 진술이 많으면 동시에 그 진술의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야 하는 이미지들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단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시가 번쇄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성혜경씨의 작품은 무리 없이 시상이 전개되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진술이 과하다는 점이 거슬린다. ‘나’의 등장이 빈번하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경우는 오히려 표현은 좋으나 시적 구성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민정하씨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있어 역량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참신하고 흥미롭다. 그런데, 이것들을 꿰는 힘이 부족하다. 스타카토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카토와 크레센도의 차이를 생각해주기 바란다. 김호성씨의 작품은 이번에도 당선권에 근접했다. 구성의 힘이나 이미지 생산 능력에 있어 기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질적인 것들을 한데 모으는 세부작업이 조금 더 필요하며 개별 작품들에서 시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조금 더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 때문에 이 수고가 다 필요한 것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주기 바란다. 잠들기 전에 몇 미터만 더 가면 될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윤성아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어놓기로 결정했다.

 

   윤성아를 추천한다. 시의 중심을 장악하는 힘이나 이미지를 벼리는 능력에 있어 신인의 기개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신인에게 관건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기량과 가능성이다. 윤성아씨의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기량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비근한 소재로부터 창의적 이미지를 생산하되 그 질료로부터 생경한 이미지가 아니라 질료를 다른 차원에서 구현해내는 이미지를 벼리는 참신성이 돋보인다. 두 번째로 다양한 이미지들을 구사하다 보면 자칫 가고자 하는 길로부터 멀어져 말단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윤성아씨의 작품은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다. 셋째, 진술과 이미지의 배합에 있어서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물론 한두 가지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윤성아씨의 가능성에 비추어보면 작은 부주의로 간주될 만한 것이었다. 이 역량으로 현재 한국 시단의 일부 젊은 시에 엿보이는 교통체증을 해소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모든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_ 원구식 박주택 오형엽 조강석 (글)

 

 

      —《현대시》 2012년 10월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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