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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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해와 감상 / 양승준

오선민 2014. 3. 12. 19:13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민적 : 예전에 호적(戶籍)을 달리 부르던 말.

          (시집 <님의 침묵>, 1926)

 

  이 시의 핵심은, 인종(忍從)과 애소(哀訴)로 살아가는 가운데서 극복의 힘을 주는 ‘당신’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가냘프면서도 끈질긴 한국 여인의 목소리이다. 여기서도 ‘당신’은 시인이 추구하는 ‘님’과 같은 존재이다.

  ‘당신’은 나를 떠났지만,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다운 삶을 포기한 채 치욕 속에서 사는 내게 삶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갈고 심을 땅’도, ‘집’도, ‘민적’도 없다. 이러한 나에게 부자인 ‘주인’과 권력자인 ‘장군’은 인격적 대우를 거부하고 치욕을 가한다. 나와 주인, 나와 장군의 대립은 못 가진 자와 가진 자, 피지배자와 지배자, 민중과 권력자의 대립으로, 이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 세계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자, 당시 현실과 연관지어 보면 우리 민족과 일제의 대립으로 민족의 삶과 존엄성이 박탈된 식민지 상황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만해는 ‘그를 항거’한 3․1 운동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내보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自責感)으로써 현실 상황을 ‘스스로의 슬픔’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타락 사회에서 치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적 자아는 윤리와 도덕, 법률은 말만 그럴듯한 것이지, 결국은 권력[칼]과 돈[황금]에 의해 지배되는 허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과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지게 됨으로써 불안감이 고조된다. 마침내 현실의 역사를 부정하고 피안(彼岸)의 세계[불교적 초월의 세계]로 도피하는 삶과, 인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 그리고 현실에 절망하고 그저 자포자기하는 삶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갈등을 겪고 있던 중, ‘당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극적 전환이 일어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적 자아는 아무리 타락한 현실 세계라 할지라도, 참된 삶을 이루기 위한 정당한 모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 귀중한 깨우침이 바로 만해로 하여금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치게 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 양승준 <한국현대시500선 - 이해와 감상>

출처 : 원주문학
글쓴이 : 별들이 툭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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