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허수경의 「폐병쟁이 내 사내」감상 / 이덕규, 손택수

허수경의 「폐병쟁이 내 사내」감상 / 이덕규, 손택수

 

 

  폐병쟁이 내 사내

 

     허수경 (1964~ )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워주고 싶었네

 

   山 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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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절이 수상하여 남정네들 뿔뿔이 흩어져 험한 세상 떠돌 때, 어린 것들과 부모와 고향 선영을 지킨 것은 여자였다. 세상을 바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떠돌다 몸 망가져 간신히 눈빛만 살아서 돌아온 사내를 살려낸 것도 여자였다. 독 오른 뱀을 덥석덥석 움켜쥐는 땀내나는 산가시내면 어떻고 피칠갑의 여자 백정이면 어떠랴! 어느 남자를 막론하고 이런 여자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자 누구인가, 당당하고 합리적인 페미니스트도 좋지만 겨우 스물 갓 넘었을 때, 이미 세상을 다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커버린 저 어린 시인의 代母적 넓은 품이 나는 더 좋다.

 

   이덕규 (시인)

 

 

   굽이굽이 막힘없는 가락이 거부할 수 없는 유장한 물결을 이루었다. '백정집 칼잽이', '허벅살 선지피' 처럼 섬뜩하게 날이 선 말들도 이 거침없는 노래 속에서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생선 배따는 것만 봐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몸서리를 칠 그녀를 서슴없이 백정집 칼잽이가 되게 하는 것은 모전여전의 하염없는 연민이다. 연민을 뗏목 삼아 우리는 더러 섬처럼 고립된 타자에게로 건너가 '슬픔만한 거름이 없음'을 발견하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갈 데인 잎차같이' 달래주고 싶은 것은 사내만이 아니라 나의 눈빛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그 눈빛이 병든 사내와 나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아픔들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모든 여성적인 것들이 우리를 이끌어간다고 했던가. 마른 대지를 적시듯 흐르는 모전여전의 이 도저한 모음을 달여 만든 진국 한 사발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손택수 (시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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