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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4)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47

딴전을 부린다는 것은 또 다른 우회적인 말하기이다. 번연히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의도적으로 딴전을 피우며 짐짓 모른 척 한다. 말하고 싶은 의도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모른 척 말하지 않는다. 이런 딴전의 상황을 맞이하는 독자는 왜 말하지 않는지 답답해하게 되고, 답답함을 직접 찾아 나서게 된다. 이런 과정이 더 깊이 그 시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고 더 큰 울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걀쭉한 목을 늘어뜨리고 해바라기가 서 있는 아침이었다

그곁 누가 갖다놓은 침묵인가 나무의자가 앉아 있다

해바라기 얼굴에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박혀 있다

태양의 궤적을 좇던 해바라기의 눈빛이 제 뿌리 쪽을 향해 있다

나무의자엔 길고 검은 적막이 이슬처럼 축축하다

공중에 얼비치는 야윈 빛의 얼굴

누구인가?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지그시 쓸어내린다

가을이었다

맨 처음 만난 가을이었다

함께 살자 했다

― 문태준, <빈 의자>(문학동네, 겨울호 )


문태준의 시에서는 해바라기와 그 곁에 버려진 나무의자가 놓인 가을 아침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계속 그 가을 아침 풍경만을 담담히 묘사할 뿐 어떤 상황도 말하지 않으며 딴전을 피우고 있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행에서 “함께 살자 했다.”라고 진술함으로써 이렇게 담담하던 상황에 딴죽을 걸며 시가 회오리 치고 있다. 다시 보자.

목이 긴 여자가 있었다. 나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던 여자가 있었다. 무엇인가 갈등으로 서로 이별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여자는 눈물이 촉촉이 맺힌 눈동자로, 야윈 얼굴로 함께 살자 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대했다. 나는 나무의자처럼 침묵했다. 때는 하필 가을이었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다. 나무와 나뭇잎이 이별하듯이 사람과 사랑도 이별을 한다. 이것이 내가 맞이한 첫 번째의 이별이었다. 이젠 빈 의자다.

시는 때로 단 한 줄로 모든 것을 말한다. 이것이 딴죽이 갖는 힘이다.


- 딴전부리기와 딴죽걸기 /우리시의 현장 2005년 1월 /성선경(시인)


ㅇ <행갈이>의 리듬에 어울리는 이미지가 있고, <산문형태>에 어울리는 이미지가 있다.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리듬에 관한 문제이다. 행갈이만 해 놓았다고 해서 운문이 되고 리듬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의 시들을 보면 산문형태의 시보다 오히려 운문형태의 행갈이 시가 설명과 진술로 떨어지고 있는 병폐를 흔히 볼 수 있다. 무조건 산문형태의 시들을 경계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단견임을 이 기회에 지적해두고자 한다.

- 정진규, [현대시학]2005년 2월호.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눈물'이란 제목의 시다.
위에 든 시에 대하여 어느 젊은 비평가가 왜 그런 따위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쓰느냐고 짜증을 낸 일이 있었다. 그런 투의 짜증에 대하여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의 젊은 비평가 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해서 시의 진실이 죽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영원한 이치다. 예수는 맨발로 갈릴리호수를 걸어갔지만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발바닥을 보여 달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도마 그 사람이다.

- 김춘수 , '통영바다, 내 마음의 바다' 중에서


ㅇ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정신주의적 경향의 시는 현대적 삶에 대한 자기 반성적 징후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중심주의와 물질중심주의의 심각한 병폐와 폐단에 대한 비판을 그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로지 욕망의 노예로만 전락해버린 타락한 인간상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다. 정신주의 경향의 시는 물질주의에 의해 방기된 정신의 위기를 진단하고 인간의 도덕성을 다심금 환기시키려는 경향을 지닌다. 여기서 정신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동양론적 사유'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이는 선사상은 물론 노장사상과 유가사상등 동양적 사유 전반에 대한 새로운 탐구와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시와 도가적 사상에 대한 경향은 우리 시대의 근원적 문제가 정신의 빈곤으로부터 기인되었슴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주의 시는 본질적으로 '존재의 거듭나기' '존재의 재정립' 이라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당대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그 시대의 시대적 요구와 무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신주의 경향의 시는 철학이 부재한 오늘의 현실, 물질주의에 압사한 정신을 다시금 일깨우려는 시인들의 시대적 책무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흔히 정신주의 적 경향의 시는 쉽게 세계에 대한 화해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현실적 갈등과 마찰을 회피할 가능성을 지닌다. 또한 과도하게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세계를 그림으로써 현실과 유리된 또는 현실이 배제된 '깨달음'의 문제에만 집중될 가능성을 지닐 수도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허할 수 있다.

- 강경희 [애지]2005년 봄호


ㅇ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슷한 소재를 다루어야 한다는 부담을 준다. 어떤 글이 예외일 수 있을까마는 소재는 것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동시대인들의 눈에서도 소재들은 일종의 군락을 이루고 있고, 그 군락 밖의 소재를 만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의 시편들을 끌어들이면 더욱 암담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들은 이미 한 분야의 소재를 상상력으로 극대화시킨 것이다. 어떤 명편들은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그 방법이 우수해서 하나의 정전처럼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형식을 벗어나고 현재의 눈을 피해서 비슷한 소재를 다르게 가공한다는 것이다. 그때 차이를 만드는 힘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없다면 차이는 무화될 것이고, 우리는 과거의 명편들을 다시 듣고 즐기는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다.

- 김남석 [애지]2005년 봄호


.....물론 억지로 해석하자면 , 해석자의 주관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 거기에 어떤 내용을 견강부회 짜 맞출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난해시들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석해온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별로 심오한 의미도 없고, 깊이 있는 철학도 없고, 그렇다고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나 미적 형상화도 없고, 문제성도 없는 작품을 그렇게 작위적으로 해석해서 겨우 무엇인가 몇 자 설명이 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작품을 -평론가들의 우상화에 최면되어 그 안에 마치 어떤, 무엇이 있으리라는 환상과 선입견을 버리고- 사실 그대로 보아야 한다. 황당 무계한 말장난 그것인 것이다.

- 오세영 [현대시] 2005년 2월호



이명훈 시인의 절필선언문(현대시 게시판에서 퍼옴)

글쓴이 : 이재훈
조회 : 38 스크랩 : 0 날짜 : 2005.05.06 15:29

절필선언문

저의 이 글이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시는 저에게 생명과 같습니다. 생명인 시를 끊는 것이 저에겐 죽음이지만
그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이 또다른 죽음을 소생시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 나오듯 오직 그 한그루 나무의 소생을 위하여
눈물을 삼키며 절필하겠습니다. 제 내부에 존재하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빛은 독방 같은 심장 속에 묻어둡니다.
이 글은 충분히 공지된 후에 지우겠으며 침묵 속에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시인들과 독자들의 무운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명훈 드림.


言, 寺, 人.

- 유안진, 2005. 5. 15,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시상식에서.



루니 래니가 철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보름달이 훤하게 뜬 밤이었으며, 그는 럼을 마시고 잔뜩 취해 있었다.
얼마쯤 가다가 그는 철길에 떨어져 있는 다리 하나에 걸려 넘어졌다. 그는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고는 다시 비틀거리며 계속 걸어갔다. 몇 분 후에 그는 또 하나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고, 다음 번에는 팔 하나를 보았다. 그제서야 관심을 갖게 된 그가 이번에는 몸통을 보게 되자 자세히 살펴보려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턱을 문지르며 몸통 주변을 둘러보았다.
" 이 외투는 분명히 낯이 익는데, 혹시...."
그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머리통에 걸려 넘어졌다. 취중에도 깜짝 놀란 그가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친구인 해리의 얼굴임을 알아보았다. 이때 몇 피드 밖에 귀 한 쪽이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가 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 귀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봐, 해리! 자네 괜찮아? "

- 오쇼 라즈니쉬 지음 ' 禪의 최고봉' 손민기 옮김, 중에서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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