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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7)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47

이 시(김성대의 시 '구인')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기표에 "안경을 벗겨준다" "내 눈동자에 손을 담가 꿈을 정돈해준다" "우주를 닦는다" "턱을 대신 괴어준다" 등 다수의 기의가 결합된 작품이다. 이러한 결합은 대체로 기의의 참신함에 의해 그 시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결정된다. 만일 기의 자체가 참신하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한 나열이나 서술에 그쳐 세계에 대한 상투적인 인식을 깨지 못한 채 식상함만 더해줄 뿐이다. 하지만 기의 자체가 참신하면 기표에 대한 개념은 기존의 상투적인 차원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 이재복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7년 1-2월호



과연 우리는 빛나는 황금의 서정시대, 그 찬란한 서정 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 인간과 세계, 주체와 대상이 분열되지 않은 그 동일성의 세계나 서정적 자아의 원형은 이 시대에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기에 시대는 멀리 왔고, 세계는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세계를 상상적 질서 안에서 재구축하거나 모방하는 일이다.
따라서 서정시는 이 궁핍한 시대의 삶 가운데서 상실된 세계와의 동일성을 찾아가 재영토화하려는 몸부림일 수밖에 없거나, 서정성을 탈구축하여 탈영토화하려는 작업일 것이다. 변화된 층위에서 시가 그들의 존재 기반인 서정성을 탈영토화하려는 작업에는 탈서정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일성을 회복하고 서정의 영역을 재영토화하려는 노력에는 근본주의적 열망이 자리하고 있다.

시의 언어는 서정의 언어이다. 전통적으로 서정은 예술로서의 서정시의 원형질을 획득하게 하는 중요한 자질로 여겨져 왔다. 서정시의 힘과 매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동일성의 시학을 노래하는 전통적 서정시는 본연의 낯익음이 있어 편안하다. 그러나 혼란과 분열, 모순과 불확정의 시대에 세계의 자아화나 자아의 세계화는 가능할까? 세계의 총체성,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세계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온전한 주체는 부정되고 의심되기 일쑤이다. 이런 회의와 부정이 낯익은 전통적 서정을 거부하고 탈서정이란 이름으로 서정의 영토를 탈영토화하려는 욕망을 부추긴다. 여기에는 낯설음도 있지만 그 낯설음이 새로움을 유발한다.
시적 인식과 방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모두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치로운 작업이다.

- 김홍진 / '시와 정신' 2006년 가을호




신인, 문예지, 등단, 시집, 시작품, 시의 발표, 시의 언어 등과 같은 말 앞에서 嚴選과 克己 그리고 미적 고양감을 주는 느낌을 전해 받으며 잔잔히 전율하고 마음을 서늘하게 가다듬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는 것인가?
최근 우리 시단을 바라보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 너무 화려한 것, 너무 잦은 것, 너무 조급한 것,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너무 부산스러운 것, 너무 장황한 것, 너무 난삽한 것 등이 주는 <값쌈 (賤)>과 <얕음 (淺)>의 기운을 크게 느끼며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누르기 어려웠다.
나는 우리 시단이 진정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면 정말 시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지금쯤 심각하게 되짚어 보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성찰의 일환으로 시가 道에 이르는 길이라는 이른바 '詩道'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詩道의 정신이 시인들의 시심의 근저를 이루고 체화되었을 때에 시의 진정한 건강성과 아름다움이 제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정효구 / [현대시학] 2006년 7월호



수시하기를, 아무리 훌륭한 마음의 작용을 지녔다 해도 깨달음에 달라붙은 채 떠나지 않으면 毒海에 빠져버린다. 비범한 한 마디를 내뱉어 천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하면 凡俗에 떨어지고 만다. 부싯돌이 반짝하는 순간에 검고 흰 것을 알아보고 번갯불이 번쩍할 때 생사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면) 十方을 坐斷하고 천 길 벼랑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活作用이 있음을 아느냐?

- 벽암록 제25칙 중에서


현재 우리 시단에서 횡행하는 시적 담론은 시의 판타지화, 시적 언어의 감각화, 그리고 위트가 넘치는 파롤적인 언어이다. 이때 우리는 그러한 시를 통해서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가. 시는 존재의 언어이지 유희의 언어가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시들은 <새롭다>는 명분 위에 시의 에스프리를 사장시키고 인간의 존재론적 운명성 또한 문학장 밖으로 내몰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후기 산업사회의 시가 창작이 되고 존재의 비의를 꿈꾼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성의 지표는 모든 가치를 자본의 지표로 환원시키는데, 시가 생의 감각 이편과 저편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보다 근원적 세계로 이입시킬 때, 그것은 현대성의 모랄과 정면충돌하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속물화되고 경박성으로 치닫는 감각화된 현대성에서 시는 잊혀진 양심이다. 아무도 꿈꾸지 않는 꿈을 꾸면서 인간의 의식을 걔혁시키는 것이 바로 시의 존재성이 아닌가.

- 김석준 / [현대시학] 2006년 6월호



시적 상상력에서 깊은 시간의식은 우리들의 삶의 원상에 대한 깊은 직관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기억의 시간의식의 미적 본령은 아련한 풍경으로서의 위안의 감상성이 아니라 삶의 근원을 향한 직관의 생성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살아있는 현재의 지평을 확장하고 궁극적으로는 우주적인 자기 존재성을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홍용희 / [문학들] 2005년 겨울호



환상성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적당한 환상성의 채용은 작품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거나 참신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환상 자체와 시에서의 환상성은 구분해서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것들이 시에 어떻게 어느 정도 들어오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환상성의 강도, 크기, 밀도, 수준 등에 따라 시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환상의 전면화의 지속은 시 읽기를 어렵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시인의 문학적 태도, 시인이 이를 시에 어떻게 수용하고 이걸 어떻게 작품으로 가공하고 있는가 하는 시작의 태도 문제도 중요해진다. 만약 어떤 시인이 전적으로 환상에 의존한 시를 쓰고 있다면, 그의 언어는 극도로 혼란해져서 그 언어를 따라가고자 하는 독자들도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환상성의 시라 해도 시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시가 다루는 대상보다는 그 대상을 다루어 하나의 시로 빚어내는 미적 조형성과 시로 성립시키는 여러 관습적인 장치들이다. 시가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인 이상 그것은 독자의 수용을 전제로 한다. 과도한 환상성의 시들은 독자와의 의사소통에 장애가 된다. 이것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모든 시는 독자의 수용에 의하여 그 의미가 완성된다. 이 점에서 보면 시는 언어공동체라고 하는 공동의 지평 위에서 움직인다. 환상시도 그 부분에서 예외일 수 없다.

- 서준섭/ [시로 여는 세상] 2006년 여름호



서정시의 고유한 성격 즉, 서정시가 시인의 파토스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예술장르라는 인식은 때로 서정시의 지평을 협소하게 만드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서를 환기하고 감정의 충일을 드러내는 것으로 서정시의 역할이 완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서와 감정의 환기는 서정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대상에 반응하는 서정적 자아의 정서와 감정은 시인의 주관적 지향성과 결부된다. 시인의 정서와 감정이 형상화하는 일회적 사건이라기 보다 이상적 삶에 도달하기 위한 부단한 정신활동의 기표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서정시는 정서와 감정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닐 가능성이 높다.
그간 사랑이나 화해, 상생과 같은 주제의식으로 독자들의 내면을 위로하고 순화시켜준 것은 서정시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주제의식이 대부분 서정시의 귀결점이라는 데 있다. 이는 서정시의 사유기반이 허약하다는 사실과 깊이 결부된다.

정서나 감정의 환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곧 사상이나 관념의 배제로 오해되는 것은 아닌가? 정감의 구체성과 관념의 배제를 등식화하는 통념이 서정시의 질적 확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서정시의 이같은 고민을 풀어보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가 선시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선시는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오도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본질로 한다. 자기정화나 깨우침을 통해 정신주의적 토대를 다지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의 선시적 경향은 전통계승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폭력적 물신주의, 속물주의에 맛서는 한 기류를 형성할 가능성을 갖는다.

- 엄경희 / [창작과 비평] 2006 여름호



지금 쓰이고 있는 우리 시는 점점 더 트리비얼리즘에 함몰되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거대 이론들이 문학과 문학인, 시와 시인들을 왜소하게 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이라고도 하겠습니다만, 그리고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어떤 시들은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시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 이리 저리 말을 몰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도 더러 봅니다. 릴케가 말했듯이 '너는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느냐, 만일 네가 그 말을 하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을 때 너는 그 말을 단 세 줄의 시에 담아라' 라는 말을 다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시에서 독자가 떠나고 있는 현실은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지만, 시를 이렇게 거칠고 무잡하게 만들고, 시인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나열로 언롱을 일삼을 때 독자들은 시를 외면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런 책임이 시인에게 있다고 해야 합니다. '평론' 말씀 하셨지만, 지금 우리 문학에서 평론은 거의 부재한 상태, 지금 우리 시단에 비평이 있느냐고 나는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누가 뭐라해도, 비평이 있든 없든, 자신의 신념을 시에 담아야 합니다.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는 시인의 아들이다. 시를 거짓 꾸미거나 불필요한 장식을 하려 하지 마라. 네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말하겠느냐? 네가 아파했고 고뇌했던 일을 그대로 써라. 네가 울면서 쓴 시가 아니면 독자도 울면서 읽지 않는다.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너무 억지스러운 데가 있고 시가 독자를 위무하기는 커녕 오히려 독자들의 마음을 불안으로 이끌고 가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 이기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년 5-6월호, 대담 중에서



나는 그래요. 요즘의 젊은 시인들이 직조해 가는 감각은 좋은데 자칫 사담이 되어 버리는 경우는 조심해야 한다구요. 이미지의 이중성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암호의 숲이 되어버릴 경우엔 아무도 그 암호의 숲을 들어갈 수 없게 되니까요. 극히 개인적인 사담에서 특별한 감동은 유발되지만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실패로 끝나죠. 시도 객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거든요. 상상의 텐트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이해가 되어야지, 독자를 이해시키는 코드를 막아버리면 아무리 신선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 시를 좋아하겠어요?

- 강은교, [시외 시학] 여름호. 대담 중에서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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