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어두워서 좋은 지금 (외 2편) / 박소유 본문
어두워서 좋은 지금 (외 2편)
박소유
처음 엄마라고 불렸을 때
뒤꿈치를 물린 것같이 섬뜩했다
말갛고 말랑한 것이 평생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어쩔 줄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들쳐 업었을 거다
아이는 잘도 자라고 세월은 속절없다
낯가림도 없이 한 몸이라고 생각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복음이었나
앞만 보고 가면
뒤는 저절로 따라오는 지난날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깜깜 무소식이다
그믐이다
어둠은 처음부터 나의 것
바깥으로 휘두르던 손을 더듬더듬, 안으로
거두어들였을 때 내가 없어졌다
어둠의 배역이
온전히 달 하나를 키워내는 것,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좋은가, 지금
오, 어쩌면 좋아
뼈만 남은 사연이 함께 굴러갈 동안
바퀴 따라가는 생은 모두 급하네
벼락같은 속도를 얻었으니
저게 모두 발자국이라면 내 발자국도 흔적 없을 터
차라리 눈발이거나 서릿발같이
가볍거나 아득했으면 좋겠네
구부러진 노인이 오그라든 유모차를 밀며 가네
서둘러 당도할 곳이 있기나 한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요란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데
가만 보니 소리만 있고 동작이 없네
고비마다 손발 떼어주고 오장육부 다 내주고
어느 밤중 깜박 잠들어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고
둘, 둘, 굴러 집 찾아가는 엄마들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가네
어쩌면 좋아, 아무렇지 않게 내가 멀어지네
내가 던진 감탄사를 꽃이 알지 못하듯
가볍고 아득한 이 온기를 알려나 몰라
어둠은 지나간 모든 것들의 그림자,
지나가는 슬픔인 줄 알았는데 내 것인가?
오, 오, 오, 오, 둥글게 굴러가네
울음
단숨에 밤하늘을 두 쪽 내고 튀어 오르는 울음이 있다
누워있던 골목까지 다 따라 솟구친다
몸속에 날선 칼이 있어야만 저렇게 울 수 있을게다
저 울음이 자유로울 동안 모두들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
어둠도 목덜미 물린 채 꼼짝 못하고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도 새파랗게 울던 삐삐주전자도
시도 때도 없이 울던 알람시계도 소리 내지 못한다
울어라 울어 실컷 울어, 고양이만 우는 게 아니다
너도 울고 나도 울지만
한 번도 곁을 주지 않는 울음에는 평생 주인이 없다
—시집『어두워서 좋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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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유 / 1961년 서울 출생.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어두워서 좋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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