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마흔한 번의 낮과 밤 / 권혁웅 본문
권혁웅
계속해야 한다.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할 것이다.
― 베케트
이를테면 심장 근처에도 약음기(弱音器)라는 게 있어서 떨리는 줄을 지그시 누를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다른 선(線)이 공명을 부를 터이니 이 문장이 다른 문장과 만나 조용히 어두워지면 좋겠다 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내가 디딘 계단은 무채색의 반음계여도 좋겠다 그가 내려올까 말까 망설일 때 내가 이 못갖춘마디를 먼저 올라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줄에 걸린 심장의 두근거림이 천천히 잦아든다면, 그게 어두워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눈을 감는 것이라면
문학은 무슨 청춘의 특별보호구역이기라도 한 듯이 이십대에 대해 얘기하길 즐깁니다. 서른 살이 유독 의미심장한 나이로 시에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서른 살은 지금껏 걸어서 올라온 청춘에 이별을 고할 만한 가장 높은 정상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는 최승자 시인의 시구가 모든 이들의 심장을 두드립니다. 이제는 아름다운 몸짓으로 올라갈 곳은 없다는 느낌. 그 느낌이 시큰거리는 치통처럼 우리를 찾아오지요.
서른 이후부터는 시간이 어찌나 황급히 달아나는지 한 해가 하루의 낮과 밤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흔한 번의 낮과 밤처럼 지나가는 사십대의 첫 해에 시인은 조용히 결의합니다. 이제 '성큼성큼'은 없을지도 모른다. 마냥 두근거리던 청춘의 심장에 약음기를 달고 한 계단도 미처 못 되는 반계단을 조롱하지 않고서 오르는 일, 계속해야 한다.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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