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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가 테러리스트의 글을 8면에 걸쳐 실은 까닭?

오선민 2011. 9. 19. 09:21

뉴욕타임스가 테러리스트의 글을 8면에 걸쳐 실은 까닭?

갑자기 쌀쌀해졌습니다. 가을이 양치기 소년처럼, 온다 온다 기다리는 사람의 애만 태우다가 별안간 찾아왔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1995년 오늘 미국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마치 거짓말처럼 똑같은 기고문이 실렸습니다. 무려 8면에 걸쳐 3만5000 단어의 장문이 도배됐습니다. 기고자는 자유클럽(Freedom Club). FBI가 유나버머(Unabomber)라고 이름을 붙인 테러리스트였습니다. ‘University And Airline Bomber(대학과 비행기 폭탄 테러리스트)’의 준말이지요. 유나버머는 1978~1995년 16번의 폭탄 테러로 3명을 죽이고 24명을 다치게 했지만 실마리도 못 잡았던 인물입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양대 권위지가 테러리스트의 요구에 응했다는 데 놀랐고, 그 글이 미치광이의 글로 무시할 수 없다는 데에 또 놀랐습니다. 유나버머는 신문사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였지만 인류를 위해 할 수 없었다”면서 “선언문을 게재하면 테러를 중지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신문가 간부들은 석 달 이상 논의 끝에 게재를 결정했습니다.

‘유나버머 선언문(Unabomer Menifesto)’은 “산업혁명 이후 현상들은 인류의 재앙”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유나버머는 현대 산업기술 시스템이 인류에게서 자율성과 자연과의 유대를 빼앗고 본성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게끔 만들어 인간 자유의 종말을 초래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 가치지상주의자, 페미니스트, 성적 소수 운동가 등의 좌파(Leftism)가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들의 반(反) 개인주의, 친(親) 집단주의는 인류의 또 다른 위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좌파는 열등한 이미지를 가진 집단을 동일화하고 미국, 서구문명, 합리성 등을 증오하지만 결국 그럴싸하게 포장된 권력욕망일 뿐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듬해 유나버머가 체포되자 또 놀랍니다. 본명은 시어도어 카진스키. 시카고에서 태어난 신동으로 16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하고 25세에 UC 버클리에서 조교수가 된 ‘수학 천재’이자 철학 박사였습니다. 그는 29세 때 돌연 교수직을 팽개치고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배경 주(州)로 유명한 몬타나의 산골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전기도, 수돗물도 없이 삽니다.

테러는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할 수가 없겠지요? 사람을 위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모순이지요. 그러나 그의 주장이 상당 부분 지금의 대한민국과 맞물려 있는 듯해서 섬뜩합니다. 어쩌면 유나버머의 주장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한 좌파의 주장과 닮았습니다. 인간 합리성과 자유의 파괴를 경고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과는 많은 부분 오버랩 됩니다.

한 때 많은 지식인이 우려했습니다. ‘바보상자’가 인간 합리성을 빼앗지 않을지, 공장형 대중문화가 진정한 문화를 말살하지 않을지, 3S(Sports, Sex, Screen)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지 않을지….

그러나 지금 누구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팝콘 브레인(순간적인 대응만 하는 뇌)’을 만들고 있어도, TV와 게임이 뇌를 마비시키고 있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공장형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젊은이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도 아무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연예프로그램에 넋을 빼앗기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자율자치의 영역으로 진입하기도 전에, 이벤트가 돼 버렸는데도 이 문제는 논외입니다. 수(數)가 행복(幸福)을 목 조르지만 아무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가을은 왔습니다. 갈바람이 뺨을 스칩니다. 하늘은 바짝 올라가 붙었습니다. 구름 때문에 더욱 파랗습니다.

오늘은 ‘1차원적 인간’을 강요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떨까요?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벗, 영혼에 속삭이는 좋은 책 한 권, 좋은 음악 한 곡이 좋은 벗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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