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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나비를 읽는 법 (외 1편)

오선민 2011. 9. 19. 12:02

나비를 읽는 법 (외 1편)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가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動詞)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유랑의 풍습

 

전생에서 내 가져온 재물인가

슬픔에게 바치는 서글픈 뇌물인가

한숨이여, 기억이 남긴 몹쓸 유산이여

무너진 흙더미 같구나, 내 불쌍한 행복아

내 생을 출발시킨 무관심한 봄은

어디로 갔는가, 가벼운 협박처럼 나를 쫓는

햇살 피해 나 울적한 그늘에 앉았네

가을은 계급장 떨어진 보병 같은 나무를

내 앞에 세워두고 또 가버리고

동의하지 않은 이 유랑에 대해

초췌한 철학은 한 번도 설명하지 못했네

나 공연히 일어나 이생으로 넘어왔네

나는 왜 나에게 죽음을 전수했는가

—《詩로 여는 세상》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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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1969년 부산 출생. 추계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시와 사상》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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