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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안부 / 함기석 본문

좋은 시 감상

할머니의 안부 / 함기석

오선민 2011. 10. 13. 11:18

 

                             할머니의 안부 / 함기석

 

 

오늘밤 흙에서 짐승의 비린 간 냄새가 난다 할머니와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어두워 우린 태반에 싸인 채 버려진 핏덩어리들 같아 바람은 늙은 말처럼 울고

 

디디, 너무 추워 찬 바닥에 살을 대고 밤마다 널 생각해 네 따듯한 등이 그리워 아침엔 내 눈에 코스모스가 뿌리를 내렸어 꽃을 피우면 봉오리에서 내 팔이 나올

 

거야이상해 어둠 속에서 돌들은 새의 음률로 울어 흙에선 계속 짐승의 비린 내장 냄새가 진동하고 풀들은 밤새 어두운 혀를 내밀어 허공이 제 몸에 뜬 문신을

 

핥아주어

 

디디, 할머니는 잘 계셔 이제 거의 다 썩었어 곧 내 귀에서도 억새풀이 돋아날 거야 내 입도 코도 눈도 거의 문드러졌어 며칠 전부턴 가시나무 뿌리가 내 폐를

 

뚫고 자라고 있어

 

정오엔 우리가 암매장된 무심천에 햇살이 공작처럼 꼬리를 활짝 펴 난 하루 중 그때가 제일 좋아 햇살이 깔깔깔 우리 주변을 빙빙 돌며 무당춤을 추거든

 

디디, 할머니와 내가 있는 이 집은 쌀자루야 네 토막이 났는데도 할머니는 웃기만 하셔 끈적끈적 살이 흐르고 벌레들이 꿈틀꿈틀 눈을 파고드는데도 함박꽃처

 

럼 웃기만 하셔

 

꽃은 피가 낭자한 식물의 광대뼈야 火印이야 유서야 죽고 나서야 난 알았어 하지만 넌 이 땅속의 메아리조차 듣지 못하겠지 디디, 미안해 이번 생일엔 갈 수가

 

없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1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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