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두부를 위하여 (외 2편) / 김승강 본문

좋은 시 감상

두부를 위하여 (외 2편) / 김승강

오선민 2011. 10. 27. 15:31

                         두부를 위하여 (외 2편)

 

                                                                                         김승강

 

두부장수가 지나가버렸다. 급히 뛰어나왔지만 두부장수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며칠을 두부 없이 지내야 한다. 두부가 없는 식탁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두부를 꼭 사야겠다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두부를 사야겠다고 알려준 이는 두부장수였다. 처음부터 두부는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이었다. 두부장수는 며칠 동안 다른 동네를 돌아다니다 다시 올 것이다. 그는 사흘에 한 번 왔다. 사흘은 기다려도 되는 시간이기도 하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사흘은 뭔가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시간이기도 하다. 잊을 만하면 그는 왔다. 두부 외에 계란이나 다른 반찬거리도 있었지만 나는 두부만 있으면 되었다. 와도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집 대문을 막 나서다 놓치고 마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그래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떠나고 사흘째 되는 날 두부를 사겠다고 줄을 설 수는 없는 일이다. 두부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한 사나흘 두부를 먹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기타 치는 노인처럼

 

노인의 기타 연주는 시원찮았다 공원에 가서 옛날 소싯적에 기타 좀 치신 분 손들어보세요, 한 뒤 뽑아 데리고 온 사람 같았다 양복은 말끔히 차려 입었지만 오래전에 맞춘 양복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그럴듯했다 노인은 공원에서 뽑힌 뒤 집으로 돌아와 기타를 꺼내어 오랫동안 어루만졌다 기타를 잘 칠 필요는 없었다 노인이면 되고 기타를 조금이라도 칠 줄 알면 되었다 무대 위에 기타를 안고 앉은 노인 위로 한 줄기 조명이 떨어졌다 노인은 앙상한 손으로 기타줄을 뜯기 시작했다 베사메무초 베사메무초, 그때 무대 반대편에 또 한 줄기의 조명이 떨어지면서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베사메무초 베사메무초, 젊은 여자가 노인이 앉은 쪽으로 바이올린을 켜면서 다가왔다 조명도 함께 움직였다 베사메무초 베사메무초, 두 사람을 따로 비추던 조명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젊은 여자는 노인 바로 옆에 섰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함께 베사메무초를 연주했다 노인은 앉고 젊은 여자는 섰다 젊은 여자가 노인의 연주를 받쳐주고 있었다 그게 젊은 여자의 역할이었다 노인의 연주는 프로의 연주는 아니었지만 훌륭했다 한순간 바닷속같이 어두운 관중석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기타 치는 노인을 보고 싶었다 공원에 가서 옛날 소싯적에 기타 좀 치신 분 손들어보세요, 한 뒤 뽑아 데려온 기타 치는 노인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기타줄을 뜯으며 베사메무초를 들려주는 아주 오래된 노인을

 

 

자판기 커피는 내가 빼올게

 

너는 방파제 끝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해풍은 네 귀밑머리를 들추고 귀엣말로 뭐라뭐라 소곤거리고 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그렇게 해보지 못했다.

그사이, 그러니까

내가 네게서 돌아서서, 어떤 횟집 앞에 있는 자판기로 가서,

동전을 집어넣고 두 잔의 커피를 빼올 동안

너는 나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는 내 뒤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네게 줄 커피와 내가 마실 커피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네 뒤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다.

네가 내게로 돌아설 때까지.

 

 

—시집『기타 치는 노인처럼』

 

----------------

 

 

김승강 / 1959년 경남 창원 출생. 경성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경상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2003년 《문학 판》으로 등단. 시집 『흑백다방』『기타 치는 노인처럼』.

'좋은 시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와 나비 / 김기림  (0) 2011.12.12
종이배 / 이준관  (0) 2011.12.12
물 끓이기 / 정양  (0) 2011.10.27
깊은 길 / 전기철  (0) 2011.10.20
아주아주 작은 집 / 김선태  (0) 2011.10.2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