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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메모 (외 1편) / 박형준 본문

좋은 시 감상

지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메모 (외 1편) / 박형준

오선민 2012. 12. 13. 14:11

지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메모 (외 1편)

 

                                                             박형준

 

그 계절에는 발바닥에 별들이 떴다

발그레한 아이의 피부 같은,

막 떠오른 별들로 가득한 벌판에서

나는 말발굽을 주웠다

밤마다 달빛에 비춰보며 꿈을 꾸었다

벌판을 지나 하늘에 화살을 박는

말 울음소리를

벌판의 꽃들이 짓이겨진

하늘로 달려 나간 푸른 바람을

말발굽의 꽃물 범벅을

 

내 잠 속으로 향내 나는 청마가 달려오며

성운 가득 밴 냄새로 별자리를 엮어갔다

빛나는 말발굽에

쩡쩡한 겨울 하늘도

파편으로 흩어졌다

우주가 내 발바닥으로 자욱하게 몰려드는

푸른 연기로

 

그러나 나는 이미 알았다

꽃들이 어스름 속에서

추억처럼 진해진다는 것을

짓이겨진 꽃물이 사실은

어스름이라는 것을

말발굽이 놓여 있는

빛의 길목으로

지난 시절의 꿈들이 수줍은 듯

그렇게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문학과사회》2012년 겨울호

 

 

불탄 집

 

  풀잎이 무성한 강기슭에 서서 한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기 위해 물단지의 물을 시체에 뿌리는 여인을. 그녀는 해가 저물 때까지 물단지에 강물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허공에서 따라냅니다. 나는 불볕더위 속에서 사람의 손이 틀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인의 손에 서리가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서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엄숙해서 허공에서 물 따르는 소리가 순백의 한(恨)으로 그녀의 손에 맺혔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나는 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곡소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울음도 없는, 풀잎이 무성한 강기슭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물 따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인이 물단지의 물을 허공에 바쳤다가 따라내면 강물은 천상의 음료에 취해갔습니다. 강물은 시체를 품고 붉은 빛으로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누군가 시체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진물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녹아 한줄기 흘러내렸고 닫혀 있던 시체가 꽃봉오리를 활짝 열었습니다. 강물이 꽃불을 싣고 먼 바다를 향해 떠나갔습니다. 강물 저 너머, 우리는 불탄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평선에서 잿더미들이 쌓이고 다시 불씨들이 허공에서 치솟는 그 불탄 집으로 돌아가 시체는 다시 태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강물에 번지는 황혼에도, 반짝이는 물단지의 물이 섞여 흘러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인은 강물 속에서 영원한 화음이 된 것 같습니다.

 

        —《문학동네》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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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준 /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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