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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한낮의 체위 / 정운희

오선민 2012. 12. 13. 14:15

한낮의 체위

 

                                           정운희

 

 

손을 뻗으면 과자가 있고 만화책이 있다

라면과 나무젓가락, 양말과 속옷, 모자와 우산

나른한 사건 현장 같아서

말캉해지다가 딱딱해지다가

자주 사용되는 소화제처럼 치명적이다

 

컴에서 쓰다 만 시를 꺼버렸다

베란다는 삭제하기 좋은 곳

목욕용 의자를 놓고 뒤돌아앉아

등이 따끈거릴 때까지 기다린다

집 나간 오빠가 돌아오기를

마지막 계단이 완성되기를

버려진 개의 파랑새이기를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올 때까지

 

멀쩡한 우주도 지루하고

춤추지 않는 벌떼도 흥미 없다

아이들은 거리를 떠도는데

손발톱은 왜 이리도 잘 자라는지

따듯한 햇빛으로 옮겨와 정리한다

 

공중에 떠도는 이름

이름을 구워먹을지 산채로 먹을지

그도 아니면

포르말린 왕창 넣어 유리관 속에 가두어 두고

평생을 썩지 않게 바라볼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오후 3시에 걸려있고

버티컬은 구름무늬를 막아버렸다

 

손을 뻗으면 타성에 젖은 애인이 있고 바나나가 있다

던져버린 브래지어와 안경과 비닐 봉투가

번데기 만드는 누에 체위*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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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돈 룩 다운(Don't Look Down)' 대사

 

 

ㅡ《열린시학》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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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희 / 충북 충주 출생. 2010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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