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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강인한 시집 『강변북로』읽기/ 하린

오선민 2012. 12. 13. 14:24

강인한 시집 『강변북로』읽기/ 하린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강변북로」전문

 

 

  강인한은 독서량이 풍부한 시인이다. 문학잡지와 시집에 실린 수천 편의 시를 꼼꼼히 읽는다. 읽을 때 그는 시인의 등단지나 등단 년도를 구별하지 않고 엄정한 문학적 잣대로 읽는다. 그래서 옥석을 가려낸다. 가려낸 옥 같은 좋은 시는 시인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온라인 문학카페(다음카페 「푸른 시의 방」)에 ‘복사(복사기능)’가 아닌 ‘직접쓰기’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간단한 평도 첨가한다. 등단 45년 시력의 시인이 그 많은 시를 그것도 직접 옮겨 적었다는 것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순전히 고집이고 시에 대한 활화산 같은 열정이다. 나태해지거나 시류에 시달리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올곧은 길을 가겠다는 선비정신을 보는 것 같아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리고 그는 문단 권력에 흔들리거나 굴복하지 않고 공개적(지면이나 카페)으로 바른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래서 강인한 시집 『강변북로』를 읽는 마음이 조심스럽다. 그가 가진 선비정신(시인정신)과 시적 역량을 오독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강인한’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자꾸 지우면서 시를 읽었다. 『강변북로』는 다양한 시적 발화와 방식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화법의 다양성, 소재의 다양성, 구조의 다양성이 이 시집에서 포착된다. 그런데 수사의 다양성은 포착되지 않는다. 조미료나 양념이 많이 들어간 자극적인 맛의 요리가 아니라 담백하면서 깊이 있는 맛을 내재하는 손맛의 요리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맛을 강요하거나 맛을 자랑하지 않고 맛의 정도(正道)만을 보여주는 장인의 솜씨다. 수제자에게 현업을 물려주고 가끔 ‘장인의 솜씨란 이런 거야’ 라고 하며 솜씨를 뽐내는, 은퇴한 장인이 아니라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끊임없이 다양한 시적 발화의 내공을 통해 보여주는 진행형 장인의 모습이다. 2010년대 한국에서 시력이 많든 적든 간에 ‘젊은 시를 쓴다’고 하면 보통은 모던한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고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강인한 시인은 한물갔다고 생각해서 손대지 않는 현실비판 시도 아주 젊게 쓴다. 「섯바닥」「농담에 대한 예의」「숭례문 오감도」「거대한 손」등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데, 풍자와 해학, 환상 기법을 활용하여 세련되게 냉철한 시적 인식을 보여준다. 이것이 그가 ‘진행형의 장인’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강인한은 지나치게 관조적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주관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대상의 외연과 내면을 통찰한다. 한발 떨어져서 대상을 통찰하고 정서적으로 그것을 느끼는 만큼만 시로 풀어내는데, 그 대상에 대해 많이 아는 듯 ‘~체’, ‘~척’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자가 시의 중심부에 있는 주관적 성향의 시에서도 절대 화자가 달변의 자세와 태도로 ‘오버 액션’을 하지 않고 시적 정황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정서만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점화」를 예로 들면, 「점화」에 나오는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목을 매고 자살한 후 납골당에 안치되는 과정을 너무나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들 곁으로 둘씩 둘씩/ 손잡고 팔랑거리는 노오란 유치원생들,/ 얕은 하늘에 나직이 떠서/ 새는 왜가리,/ 아랫도릴 벗고 알몸으로 날아가는 왜가리.// 열쇠를 찾아 시동을 걸며/ ‘삽입!’/ 가벼운 파열음을 비눗방울처럼 띄우며 웃던/ 여자,/ 목을 맨 게 겨울이었다.//목덜미 아래로 가늘고 흰 손가락이 흘러/ 진초록에 금빛 네일아트가 빛났는데/ 여자의 몸속에는/ 세찬 여울이 있었나 보다.// 카네이션 두 송이 쓸쓸한 납골함 주변에/ 잔인한 시간을 호명하는 바람소리./ ‘삽입!’/ 분홍 입술의 파열음, 시든 꽃의 셀로판지가/ 투명한 소리를 낸다.”(「점화」부분)는 시의 후반부인데, 화자가 ‘여자’를 무척 사랑했음을 암시한다. 처음엔 화자와 약간의 유대감만 있는 여자처럼 보이지만 그런 암시를 통해 건조한 슬픔을 맛보게 한다. “‘삽입!’/ 가벼운 파열음을 비눗방울처럼 띄우며 웃던/ 여자”나 “목덜미 아래로 가늘고 흰 손가락이 흘러/ 진초록에 금빛 네일아트가 빛났”던 여자는 특별한 배려나 관심이 없이는 대상에게서 발견해 낼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절대 격정적인 감정이나 행동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렇게 강인한은 지나치게 주정적이지 않은 위치에서 그 현상이나 풍경 안에 화자의 진솔한 정서를 암시 기법을 통해 녹여내고 있다.

강인한은 『강변북로』에서 주로 도시의 이미지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탐닉한다. 도시 안 유,무형의 대상들이 갖는 비의(秘義)를 포착해 내는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공간을 “고독한 물고기”(「고독한 물고기들의 산책」)가 되어 산책하듯 그려내고 있다. 시인이 그런 산책에서 발견한 것은 사는 게 모두 “습관성 악몽”(「아껴 신는 악몽」)이라는 것이다. 악몽이 연속인 삶을, 그는 도시 곳곳이 보여주는 풍광을 통해 발견한다. 「강변북로」도 그 중 하나이다. 강변북로를 끼고 흐르는 강을 통해 시인은 또 하나의 ‘악몽’에 젖는다. 강의 “하류에서 발견”될 “그림자”(「악몽」)와 같은 악몽. 「강변북로」에 나오는 강은 비극을 내재한 도시의 ‘그림자’다. 밤에 더욱 더 선명해지는 그림자. 그런데 시 속의 강은 밤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간직한 비의(悲意)를 드러내지 않는다.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아 낭만적인 분위기의 자태로 다가온다. 하지만 밤이 되면 강은 다른 의미의 모습으로 흐른다. “검은 강”이 되어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상처와 슬픔을 품은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는 것처럼 느낀다. 시인은 시의 후반부에서 ‘검은 강’이 품은 상처와 슬픔의 근원을 이야기한다.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그 주인공이다. 그 비극과 슬픔을 간직한 채 시간이 흘러 강은 21세기를 맞았다. 하극상으로 죽은 군인이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본” 하늘에서는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가 열린다. 세월과 역사의 무상함이 전해온다. 고대 삼국시대엔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이었다. 어디 강과 관련된 존재들의 죽음이 그 군인 혼자만의 일이었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더러운 허공”이라고 명명하며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은 연민을 느낀다.

강인한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풍경, 특히 도시적 풍경에서 ‘악몽’과 ‘비극’을 읽는다. 그런데 그것을 과장하거나 흥분된 어조가 아닌, 그렇다고 지나치게 관조적인 태도가 아닌 입장에서 긴장감 있게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 속에서 그는 늘 성실한 태도로 삶과 대상에 임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끊임없이 시적 대상 곳곳에 숨겨진 비의(秘義)를 예리하게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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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1998년〈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시인세계》 시 당선.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계간《열린시학》편집장.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열린시학》2012년 겨울호, 「하린 시인의 신간 시집 읽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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