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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맨발의 이사도라와 예세닌

오선민 2013. 1. 2. 14:10

맨발의 이사도라와 예세닌

 

 

   “내가 멀리에서 본 광경은 기다란 행렬이었다. 음울하고 비탄에 잠긴 그들이 관을 메고서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나를 태운 마부는 속력을 늦추고는 몸을 구부려 성호를 그었다. 나는 어슴푸레한 새벽에 공포에 가득 차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운명의 1905년 1월 5일,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릴 빵을 요구하러 겨울궁전에 왔다가 학살당한 노동자들이었다. 이 슬프고도 끝없는 행렬이 내 앞을 지나는 동안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다시 뺨에서 얼어붙었다. 내가 이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내 전 생애는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이 글을 쓴 이는 우리가 화려한 스캔들과 ‘스카프 죽음’으로만 알고 있던 이사도라 덩컨이다.

 

파산한 은행가의 딸

 

   이사도라 덩컨은 1877년 5월 26일 달콤한 탐욕의 자본주의가 화려하게 타오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별이 빛날 때’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낸 일이었다. 이사도라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덩컨 은행이 파산했고, 고객 중 다수였던 노동자와 하녀들은 시위를 벌이며 그녀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덩컨 은행의 파산은 수많은 남녀 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대단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금주령을 모범적으로 지킨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위법자로 만든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덩컨 씨는 그저 실패한 은행가로 묘사하기엔 아쉬울 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산 그의 내면은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였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의 거부할 수 없는 연인으로서 매력을 지녔다. 이사도라는 이런 아버지를 성가신 짐인 동시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파산과 이혼으로 인한 궁핍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손수 짠 빨간 망토와 모자를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편물을 팔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큰 소리로 글을 읽어주었는데, 그때 이사도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였다. 이사도라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즐겨 말했다.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리라. 그리고 내가 취한 것에 그대도 취하리라.’

  덩컨 가족(어머니와 네 명의 형제. 이사도라가 막내다)의 가장 큰 특징은 생계를 위해 끝없이 돈벌이에 매달리면서도 언제나 시와 음악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라는 훗날 자신의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 발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뤄졌고 학교 교육은 쓰레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해변으로 뛰어가 나체로 춤을 추었는데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당대의 천재들과의 뜨거운 사랑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셀리의 미모사, 꽃의 개화, 벌들의 비행, 오렌지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자유분방하고 찬란한 금빛….’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찬양한 것들이어서 이사도라는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결사 반대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일자리를 구하러 갈 때 이사도라는 이런 글을 썼다. “내가 태어난 이 다정다감한 땅을 떠나 어린 순례자가 되었고 기차는 동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거대한 로키 산맥을 지나고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는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만만치 않은 무관심과 몰이해,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미국을 떠나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 이사도라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 도자기 전시관에 매료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까지 춤을 추며 길을 가는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고, 이사도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스 말고도 그녀가 찬양한 것은 니체, 베토벤, 쇼팽, 로댕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라고 했다.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당대의 천재적인 남자들과의 뜨겁고도 짧은, 기이할 정도로 평생을 가는 질긴 사랑으로 점철되었는데, 중년을 넘기면서부터는 그녀가 1000명의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는 푸른 눈의 아름다운 남자 고든 그레이크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이 아이들이 이사도라 인생의 가장 큰 비극으로 자리 잡는다. 꽃이 만발한 4월의 비 내리는 봄날, 이사도라는 두 아이 데어도르와 패트릭, 그리고 보모와 함께 모베랑이라는 운전사가 운전하는 르노 자동차를 타고 거처인 베르사유에서 파리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춤 연습 때문에 지루해할 아이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는데, 그때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탄 자동차는 센 강을 따라가다 엔진이 꺼졌고 운전사가 차 밖으로 나와 다시 엔진을 걸었을 때 차는 강둑의 경사면 아래로 질주해 물속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차를 강에서 꺼냈을 땐 사고가 난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난 뒤였고, 아이들은 보모에게 매달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로 파리 시민들은 미친 듯이 아이들 이름을 울부짖으며 센 강변을 뛰어다니는 이사도라를 몇 번이고 볼 수 있었다.

 

금발의 천재시인 예세닌과의 결혼

 

   아이들이 죽은 뒤 1914년 이사도라는 러시아로 떠났다. 그곳에는 그녀의 비범한 생애 동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고독’이 가공할 만한 존재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예세닌이란 천재 시인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가 대단한 천재일 뿐 아니라 대단한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엄청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처음 보고 이렇게 느꼈다. “나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처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아마 너는 그 공통점을 모르겠지? 그는 어린 패트릭의 모습이었어. 패트릭이 성장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

   이사도라가 예세닌을 통해 본 것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금발의 아들 패트릭이었다. 이사도라의 예세닌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와도 같은 한없는 이해와 염려, 헌신의 모습을 띤다. 작은 키에 가냘픈 체구, 눈부신 금발, 마치 1월의 딸기처럼 보이는 예세닌과 춤을 추기엔 너무나 살이 쪄버린 깊고 슬픈 눈빛의 이사도라는 무려 열여덟 살 차이가 났다. 그녀는 유럽 여행을 위한 세관 신고 때문에 예세닌과 혼인 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50세 가까운 나이를 38세로 속였다.

   그들의 15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은 악몽 그 자체였다. 예세닌은 술에 취하면 이사도라를 더러운 늙은 암캐라고 불렀고, 뛰쳐나갈 때까지 폭행했으며, 호텔 기물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파괴했다. 그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렸고 광적으로 돈, 반지, 시계, 술, 신발, 모자, 실크 셔츠, 손수건, 스카프에 탐닉했다. 이사도라가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콘서트에 데려갈 때마다 예세닌은 모든 양복점 앞에 멈춰 서서 맘에 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바로 사버리곤 했는데, 이사도라는 푸른색 정장에 심홍색 넥타이, 흰색 부츠를 신은 예세닌을 옆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금발의 천사가 바로 제 남편이랍니다” 평생에 걸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한 것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그녀에게 예세닌과의 삶은 추함 그 자체였다.

 

내 몸은 나의 예술의 성전입니다

 

   "나는 사랑을 위해 창조된 사람이지만, 또한 고통을 위해 창조된 것도 같아요."

   —이사도라 덩컨(1877~1927) 근대 무용의 창시자이자 선구자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

   뉴욕·시카고의 최초 공연이 성공하지 못하여 미국에서는 불우한 생활을 보냈다. 1899년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작은 규모의 리사이틀을 열어 인정을 받은 뒤, 파리·부다페스트·베를린·러시아 등 각지를 순회하였다.

 

   전통적인 투투(tutu)와 토슈즈(toeshoes)는 육체를 속박하는 것이라면서 싫어하여, 투명한 의상을 입고 맨발로 춤을 추는 등 고전발레 형식을 배격하고 자유로운 무용을 제창, F.쇼팽 등의 곡에 맞추어서 반(半)즉흥적으로 춤을 추었으며, 그리스신 바코스의 무녀(巫女)를 흉내내어 격렬하고도 도취적으로 머리를 뒤로 떨어뜨리면서 춤추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사도라 덩컨의 춤 세계관은 그 시대의 여러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초 미국 여성들의 자유의 표상이었으며 자유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베를린·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설립하여 무용수 양성에 힘썼고 G.크레이그·P.싱어·S.A.예세닌 등과 교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3년 사고로 두 아이를 잃었으며, 1927년 9월 자신이 타고 있던 차의 뒷바퀴에 스카프가 말려들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자유분방한 사랑과 무용으로 세계를 휩쓴 그녀는 한때 파리의 조각가 로댕에게 사랑을 못 바쳐 안달했고,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드 대공의 사랑을 받았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그녀의 춤을 비방하던 성직자들을 적극 무마해 주었고,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이사도라처럼 춤추는 어린이가 되기를 바랄 만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사도라가 파리에 머물고 있던 1913년 그녀의 어린 딸 디어드로와 아들 패드릭이 유모와 함께 자동차를 탁 드라이브하다가 마차를 피해 강으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 사랑하던 자식들까지 자동차 때문에 잃어버린 비운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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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 1895~1925)|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은 주로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을 애수에 띤 감정으로 아름답게 노래한 20세기 초 러시아의 서정시인이다
   그는 콘스탄티노보라는 마을의 농사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도시로 이주하는 통에 어린 시절 신앙심이 아주 깊은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9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재능을 인정한 선생의 권유로 모스크바에 가서 인쇄소에서 일 하면서 써서 발표한 시로 문학의 신동으로 알려졌다. 불과 15세 나이에 쓴 ‘주홍색 여명(1910)’이란 시에서 이미 뛰어난 시인 적인 재질을 보인다.

“주홍색 여명이 호수 위를 비친다/ 소나무 숲에서는 큰 뇌조의 울음소리가 울려 나온다.
꾀꼬리의 울음도 어딘가 있구나 허공 속에 숨어서/ 그러나 나만은 울 수 없지- 이 소리는 내 영혼의 불빛이다.
나는 네가 저녁이 되면 길가에서 나타날 것을 안다/ 우리는 건초 가리 밑에 있는 신선한 짚단 위에 앉을 것이다.
나는 취할 때까지 네게 키스를 퍼부을 것이야. 나는 너를 꽃 마냥 마구 구겨놓겠지/ 이렇게 도취된 행복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끊임없이 애무하는 손길로 인해 네가 입었던 비단 자락을 벗어 던지겠지/ 그러면 나는 너를 품에 안고 아침이 올 때까지 숲 속으로 가리라.
큰 뇌조의 울음이 울리게 하자/ 주홍색 여명에는 달콤한 멜랑콜리가 조금 있구나”


   이 시에서 보듯 그는 성적으로도 무척 조숙해서 18세에 인쇄소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사귄 안나라는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 유리를 얻었다. 유리는 스탈린 숙청시기에 체포되어 1937년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농사꾼의 자식이었지만 푸른 눈동자에 금발을 한 귀공자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게다가 부드러운 음성과 낭만적인 성격으로 해서 짧은 나이에 5번이나 결혼했고 많은 염문도 뿌렸다.

   18세에 쓴 시 ‘자작나무(1915)’에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서정성이 짙게 배어있다.

 

 “자작나무/ 내 창 밑에서/ 은과 같은/ 눈에 씌워 있네.
굵은 가지들에는/ 눈이 뿌려져서/ 순백의 눈으로/장식하고 있네.
저기 자작나무가 서 있네/ 잠든 것 같은 적막 속에/ 눈송이가 밝게 번쩍이고 있네/ 황금색 태양 밑에서
그리고 석양이 천천히/ 한바퀴를 돌면/ 나뭇가지는 장식하고 있네/ 새로운 은색 옷을 입고”

   그의 초기 시는 러시아 전설에서 자주 영감을 받았다. 시인은 1916년 첫 시집 ‘라두닛차(‘죽은 자를 위한 의식’ 또는 ‘모든 성인의 날’로 번역됨)’를 발표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전통적인 시골 생활, 민속 문화, 어린 시절의 아직 개발되지 않은 러시아 풍물, 그리고 자연에 대한 범신론적 믿음을 시로 표현했다. 그가 그린 러시아의 시골은 슬픔이 깃든 낭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러시아 농민들이 지녔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보호자가 되리라는 소박한 믿음도 보인다.

   러시아 혁명의 과격파인 트로츠키는 예세닌의 시에서 중세기 냄새가 난다면서 과거 지향적인 취향을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작가이며 언론이었던 일리야 에렌부르그는 “막심 고르키 같은 위대한 시인은 예세닌이 그 앞에서 새로 지은 시를 낭독하면 깊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예세닌의 자살

 

 

   이사도라 덩컨과 지낸 짧은 기간의 악몽을 떨쳐버리려는 듯 아직도 젊은 시인 예세닌은 모스크바에 돌아오자 미모의 한 여배우와 결혼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갈리나란 자기의 여비서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갈리나는 예세닌이 죽은 다음 해 첫 번 기일에 그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다.

   예세닌은 점점 무절제한 상태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여류시인 나데즈다 볼핀을 임신시켰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알렉산드르 볼핀-예세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생전에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알렉산드르는 나중에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 되어 1960년대 안드레이 사카로프를 중심으로 했던 공산 독재 반항 운동의 주도자가 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한 안드레이는 유명한 수학자로 활동했다.

  1925년 예세닌은 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손녀 소피아 톨스토야를 만나 다섯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그를 도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심신이 완전히 황폐되어 계속 술을 마시고 심지어 코카인까지 손에 대었다.

   그 무렵 예세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야코브스키 시인은 “나는 그를 아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돈 다발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강요하는 것을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우울한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동료들에게 예세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말머리를 꺼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를 도울 방법이 전혀 없었다”라고 적었다. 결국 예세닌은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병원에서 퇴원하자 부인을 모스크바에 남겨놓고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가서 한 호텔에 투숙했다. 그는 자살하기 전에 붉은 글씨로 시를 쓰려 했지만 호텔 방에 비치된 붉은 잉크는 말라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팔목을 잘라 피를 내어 아직 식지 않은 그 피로 시를 썼다.

   이 시를 봉한 다음 친구인 시인 에를리크에게 주면서 자기 앞에서 읽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12월28일 방 천장에 있는 난방용 파이프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30세였다. 죽고 난 다음 에를리크가 펴 본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피로 쓴 유서 시였던 것이다.

 

“안녕히, 내 친구여, 안녕히/내 사랑,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있네/ 이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헤어짐이야/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해요.

안녕히, 내 친구여, 악수도 없이 아무 말 없이/ 우리 이마에 슬픈 주름을 남기지 말자/ 이 세상에서 죽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 물론 인생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니까”

 

    스탈린과 후르시체프 시절 예세닌 작품은 모두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암송했으며 전장에 나간 많은 병사들의 손에는 그의 낡은 시집이 쥐여 있었다.

   1960년대에 복권이 되어 그의 시집은 다시 출판되면서 빛을 보게 됐다. 그의 서정이 넘친 시들은 한국에서는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후에 월북한 시인 오장환에 의해 처음으로 ‘예세닌 시집’으로 소개되었다.

 

 

정유석(정신과 전문의)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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