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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강인한의 「겨울 가로수」감상 / 권순진

오선민 2013. 1. 21. 09:59

강인한의 「겨울 가로수」감상 / 권순진

 

 

겨울 가로수

 

   강인한

 

 

하는 수 없구나 인제는

자기 몫의 추위를 안고

걸어가자

아들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아득하고

건너야 할 강과 밤은

아직 많은 것을

 

이 겨울 사금파리로 빛나는

아침 햇살을 나눠 받아

맨살의 가지에 걸치고

뿌리로 뿌리로 내려가자

내려가서는

아슬한 물소리 속에

한때의 헛소문으로 더럽혀진

귀도 씻고

눈도 씻을 일이다

 

가자, 아들아

우리들 헐벗은 등허리에 스치는

한 움큼 눈보라도

넉넉한 꽃으로 피우면서

제 몫의 아픔이라면

한 움큼씩 녹이면서

살아갈 일이다.

 

 

               — 1986.12.3 <조선일보>에 발표 당시 제목은 '裸木'.

                시집《칼레의 시민들》(문학세계사,1992)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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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20여 년 전 어느 겨울밤 추위에 덜덜 떨며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진 은행나무 가로수 밑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모두가 어깨를 잔뜩 웅크린 모습들이었다. 그때 시인은 ‘가령 우리가 따뜻한 손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추위를 조금씩 덜려고 하여도 그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차피 우리는 제각기 주어진 몫만큼의 추위에 시달려야 하고,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추위는 견뎌내야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무렵 시인은 아들의 손을 잡고 공중목욕탕을 찾는 일이 잦았다. 아빠의 등도 곧잘 밀어주는 아들이 대견하기도하여 자그마하고 도톰한 녀석의 손을 잡고 목욕탕 가는 일은 참으로 즐거웠다. 목욕탕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내가 너와 함께 이렇게 손잡고 가는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당시 시인의 나이 사십대 중반이었으니 그런 기회가 사실 많지 않았을 것이다. 메마른 나뭇등걸 같은 시인의 손아귀에 전해오는 아들의 따스한 체온이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웠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제각기 살아간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 몫의 주어진 운명에 부대껴야 하는 걸 새삼 느꼈다. 그것을 시인은 아들의 체온을 느끼며 잡은 손에다 힘주어 전해주고 싶었다. 무성했던 이파리들을 모조리 떨구고 아스팔트 양편에 나뉘어 을씨년스럽게 늘어선 거리의 가로수들이 마치 어디론가 먼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시인은 이 겨울에 저 나무들이 다정히 손잡고 가는 곳은 어디일까. 나무와 나무가 손잡고 도란도란 끝없이 걸어가는 곳이 어쩌면 뿌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머문다.

   ‘뿌리로 뿌리로 내려가자 내려가서는 아슬한 물소리 속에 한때의 헛소문으로 더럽혀진 귀도 씻고 눈도 씻을 일이다’ 나무는 끊임없이 하늘로 뻗어 오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나무줄기가 하늘로 뻗어 올라가면 갈수록 뿌리는 땅속으로 깊이 뻗어 내려야 한다. 하지만 도심의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박고 공해에 찌든 환경 속에서 한 그루 올곧은 나무로 성장하기란 버겁고도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우리들 헐벗은 등허리에 스치는 한 움큼 눈보라도 넉넉한 꽃으로 피우면서 제 몫의 아픔이라면 한 움큼씩 녹이면서 살아갈 일이다.’

 

  권순진 (시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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