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달팽이 (외 2편) / 김유석 본문
달팽이 (외 2편)
김유석
내 몸엔 나선의 미로가 들어있다. 몸속에서 헤매다
몸 밖의 또 다른 미궁으로 겨우 기어 나와 두리번거리는 걸 길이라 한다.
곡선을 풀어 곧은 행적을 남겨야 하는 나는 고행의 족속, 동시에
끈끈한 흔적을 태엽처럼 몸에 되감으며 조금씩 나아가는
나의 길은 뫼비우스의 띠, 가다 보면 안과 밖이 바뀌는 걸음도 어지러워
점점 더 느리게 가는 쪽으로 진화해가는 중이다.
놀이의 방식
거미는 번지점프의 원조, 집을 짓기 위한 그 위태로운 곡예에서 놀이가 나왔다. 떨어지다 멈춰지는 지점, 아뜩함이 전율로 바뀌는 통점에 거미는 거꾸로 붙어산다.
암사마귀는 교미 도중 수컷을 잡아먹는다. 머리부터 먹는다. 머리가 없어진 수컷은 더욱 격렬하게 교미를 하며 죽어간다. 잔학성과 쾌락은 동일한 감각*, 그것은 머리와 상관없다.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증거이다. 개미의 생각은 앞선 개미로부터 나오고 앞선 개미의 생각은 또 그 앞에 선 개미로부터 나온다. 칠월 한낮 장례행렬처럼 늘어서 먹이를 나르는 저들로부터 우상이 나왔고 우상으로부터 계급이 생겼고, 그때부터 개미는 졸라매기에 충분한 허리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을 모두 헛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헛것들 가운데 또 다른 헛것을 보여주는 환상마술을 본 적 있으신가. 카멜레온의 두 눈은 원형(圓形)으로 따로 도는데 두 눈알이 교차할 때마다 색깔이 변한다. 트릭은 몽롱한 실재
본능과 생각의 경계에 사는 해파리는 입과 항문의 구분이 없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생각한다. 생각은 배설이다 항문에서, 아, 아니 입에서 나온다.
――――
* 보들레르
바람 조율사
우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웅크려
풀이 휘는 반대편의 장력을 익힌다.
중심에서 멀수록 팽팽히 당겨지는 뿌리의 힘을
꽁무니로 빨아들여 체액과 섞는다.
몸통이 부풀고 섬모가 돋는 발에
무엇인가 끈끈하게 만져질 때
한 번 디뎌본다. 잎사귀가 휘저은 허공
주르르 내리는 것 같지만
수없이 겹쳐 있는 바람의 나선들에 휘감기는
그곳의 벼랑에서 집 짓는 법을 떠올린다.
집은 현장이다. 배고픔과 포획
공것 같은 기다림을 한데 걸어둬야 하는 그곳은
가끔 저조차 헛짚을 만큼 휘청거려야 하므로
바람보다 질기고 유연한
풀잎과 풀잎, 그 흔들림을 얽는다.
중심은 늘 움직여야 한다.
흔들림을 따라 이동하는 평형감각을
풀잎을 당겨가며 줄에 입힌 후
말랑한 사각 틀마다 양쪽의 허공을 끼워 넣으면
살짝 들춰지는 망사 사이
파닥거리는 바람의 각선
저 거미, 지금 바람을 조율하는 중이다.
―시집『놀이의 방식』(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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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1960년 전북 김제 출생, 전북대 문리대 졸업. 1990년〈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 『상처에 대하여』『놀이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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