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피타고라스의 달 (외 2편) / 정진영 본문
피타고라스의 달 (외 2편)
정진영
달이 숫자 모양으로 떠오르는 시간, 경리과 K 과장은 버스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무심히 본다 어둠 속에 고여 있던 눈알이 희미하게 유리 위로 튀어나온다 눈동자 속으로 빌딩 창문들이 금전 출납부 잔고란 넘겨지듯 휙휙 지나간다 종일 자신이 들여다보던 아라비아 숫자들 123456789 눈알 속으로 파고들듯 일제히 각을 뒤튼다 완전한 수로 끝나지 못해 버석거리는 숫자들, 그의 후줄근한 오늘 뒤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점점 더 눈알 안쪽이 부풀어 오른다 터질 것 같아, 아아 눈꺼풀을 질끈 내리감는다 그의 어지러운 하루가 으깨진다 고였던 숫자들이 쏟아진다 텅 비워지는 눈동자 속, 드디어 숫자 10이 그의 안구 속으로 굴러들어가 환히 박힌다.
중환자실의 까뮈
책을 읽어주다가
환자의 호흡을 더듬어 본다
들이마시고 내쉬어진 글씨들이
병실 공기를 채우고 있다
잠깐 멈춰진 그의 무호흡이
페이지를 와르르 넘긴다
그가 접어 둔 곳, 알제……
그는 반으로 접힌 자리를
이제는 펼쳐놓고 싶어 한다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간
장례미사 문장이 쓰여 있는 곳
그는 끝까지 쉬지 않고 넘겨져
그곳에서 완전히 평온해진
쉼표를 찍고 싶어 한다
오오 서둘러야 한다
저 페이지에 산소 눈금을
다시 붙여주어야 한다
책갈피가 부풀도록
산소를 채워놓아야 한다
빠르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수족관 속 미아보호소
수족관 속 물고기가 버둥거린다 입 밖으로 새나오는 공기 방울들 말이 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집이 어디였더라, 물속 집 주소는 지워진 지 오래 멍하니 멈춰선 아이의 물색 눈동자 속에서 지느러미가 흔들린다 아이는 물이끼가 달라붙은 통유리를 두드린다 물의 벽을 두드린다 물고기 뻐끔거리는 입 모양을 따라 하며 수족관을 엿본다 물결 커튼이 잠깐 흔들렸던가 불분명한 발음들이 수족관 유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아이는 물속으로 들어가려 안간힘을 쓴다 수족관을 열기 위해 애를 쓴다 아이가 중얼거릴 때마다 공기 방울들이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아이의 시야를 가리는 몇몇 기억들마저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린다
서서히 줄어드는 아이의 말소리,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물고기 집 주소가 보이지 않는다
—시집『중환자실의 까뮈』(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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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 1968년 충북 단양 출생. 충북대 철학과 졸업. 200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중환자실의 까뮈』. ussa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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