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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김명은의「건강진단수첩」평설 / 조풍호

오선민 2015. 3. 25. 15:03

김명은의「건강진단수첩」평설 / 조풍호

 

 

건강진단수첩

 

  김명은

 

 

 

면봉, 남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에요

입이 큰 여직원이 항문의 변을 묻혀오라며

이름표가 붙은 플라스틱 막대를 내밀어요

면봉의 혓바닥이 하얗게 말라요

줄 서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해요

보건증 검사는 항상, 너무, 폭력적이야

잘 생긴 젊은 남자가 침을 뱉듯 굴욕을 뱉어내요

꽉 조인 청바지가 괄약근을 조이고

알바생들이 북적대는 보건소 마당에서 뒹구는 은행알

열매는 암수를 구별하지 않아요 배후가 없는 표리일체죠

내 첫 관계도 굴욕이었어요

형광 불빛 파편이 벌어진 입으로 쏟아졌고

손바닥에서 갈라져 나온 뱀들이 머리에 똬리를 틀었어요

수첩을 들고 두 개의 사각 유리문을 통과하는

키 크고 어깨가 넓은 여자의 걸음이 불안해요

오수와 우수 맨홀 뚜껑을 밟고 가는 굽 낮은 구두

발밑에는 절반으로 나눠 버려진 듯한 그림자의 다리

나는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해

어느 트랜스젠더의 울음 섞인 굵은 목소리가 들려요

두꺼운 커튼 사이에서 검은 슬립이 흘러내려요

 

 

 

김명은 / 1963년 전남 해남 출생.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사이프러스의 긴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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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 암나무의 노래

 

   조풍호

 

 

   1989년에 제작된 올리비에델 감독의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는 뒷골목의 마릴린 먼로인 ‘트랄라’라는 창녀가 나옵니다. 동네 건달들과 매춘을 빙자해 돈이나 뜯어내는 범죄자이지요. 그러나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 병사와의 사랑이지요. 부두에서 전장으로 떠나는 병사에게서 진심어린 편지를 받은 트랄라는 공장지대로 돌아와 파업에 참가했다 돌아가는 노조원들에게 “내 몸을 가져.” 외치며 윤간을 자처합니다. 그러고는 자동차 안에서 100여 명의 남성(수컷)들의 몸을 받아내지요.

 

   시는 본질적으로 1인칭 시점입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요. 우주적 연민은 시인의 책무입니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연민'과 '시혜자로서 동정'은 다른 것입니다. 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일련의 시들이 잔뜩 실린 시집을 본 적이 있지요. 관찰자 시점이 우주적 담당자인 시인을 선행상을 받아야 할 모범생으로 전락시킨 경우입니다. '내 첫 관계도 굴욕이었어요.' 김명은 시인은 다행히 그런 우려에서 벗어나는 장치를 슬쩍 깔아둡니다. '나'가 관찰하던 '나'인지 진단 받는 자들 속의 '나'인지부터 그 '첫'이 매춘의 시작점인지 다른 남성과의 첫 경험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지요.

 

   김명은 시인은 '입이 큰 여직원' '혓바닥' '항문' '침' '괄약근' '뱀' '똬리' 섹스의 부산물이거나 섹스의 연상물들을 총동원합니다. 특히 도입 부분의 흰 '면봉'은 이 시의 마지막 행 '검은 슬립'과 색채의 대비를 이루며 시를 흐르고 꽉 차게 하는 제재입니다. '남근'에 대한 조롱적 풍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비자발적 서비스업자인 매춘부가 남성 구매자(수컷)들이 떠난 자리에서 툭, '뱉어'낼 수 있는 '굴욕'에 대한 소극적 전복이겠지요. 라캉에게 남근은 결여입니다. 결여는 욕망의 필요조건이니 남근은 결국 욕망의 시니피앙이지요. 아시다시피 일반적 욕망은 꿈꾸는 자에게 먼저 가해지는 '폭력'이지만 매춘에서는 '낙인'을 수반하는 일방적 폭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역사만 보아도 그 폭력의 탄생을 어림잡을 수 있지요. 종합 예술인이었던 기생이 근대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권번이 되고 위안부가 되고 급격한 산업화의 파생물로 변해가면서 매춘부들은 여성이기 이전에 폭력의 대상물로만 남습니다. 김명은 시인 시선은 '은행알'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건강진단'이 '매춘부들을 위한 것인가, 구매자들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것이지요.

   은행나무는 암수가 따로 있는 대표적인 나무입니다. 수나무의 가지는 뻗어서 하늘을 향하고, 암나무는 대지를 감싸듯 넓게 퍼져서 드리우지요. 그러나 십 리를 벗어난 수나무 암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의 고약한 냄새, 필요악처럼 널려있는 매춘에 대해 시인은 어떤 생각을 열어갈까요?  아!  트랜스젠더가 있습니다.  트랜스젠더는 '태어났을 뿐'입니다. '잘못'은 없지요.

 

   라캉의 대척점에 주디스 버틀러가 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 담론의 전제인 '억압자 남성'과 '피억압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철학자입니다. 스스로가 레즈비언이기도 한 주디스 버틀러에겐 섹스, 섹슈얼리티, 젠더 등은 제도 담론의 권력 효과일 뿐인 것이지요. 이성애 중심주의, 남성중심 성을 넘어서 '암수를 구별하지 않는' '배후가 없는' '울음 섞인' '굵은 목소리'의 성소수자를 보듬어 보려는 것인데요. '본질적 여성'을 없애는 것, 곧 차이가 만들어 낼 '차별'을 막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구축이겠지요.

 

   앞에서 언급했던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트랄라가 노조원들을 상대로 하는 '자발적 성 결정권' 행사는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윤간하는 남성들은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사랑을 한 남성과의 이별이 가져온 슬픔에 대한 '위악적 행위'였을까요? 남성(수컷)들의 몸을 받아내는 자동차 안은 신전이 되고 트랄라는 성스러운 여사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요? 100명의 '남성'들은요? 100개의 '남근'은요?

 

   이 시가 흘러가다 닿은 '두꺼운 커튼' —라캉의 ‘남근’은 여전히 ‘하얗게 마르’지 못하는 욕망이라는 ‘폭력’입니다.

 

 

 

                      —《포엠포엠》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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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호 / 1966년 충북 괴산 출생. 1997년 《문학사상》등단. 시집『사랑을 자꾸 생화라 부르고 싶어진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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