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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제목 붙이기

오선민 2015. 4. 1. 11:49
시의 제목 붙이기


아내가 시집올 때 자기 사진을 챙겨 가져왔다. 친구들과 학창 시절에

찍은 사진,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사진, 혼자 멋을 부리고 찍은 독사진…

사진과 함께 그 시절의 추억도 같이 묻어 있을 것이었다. 유치원 다닐

때 찍었다는 다섯 살 때의 흑백사진을 본다. 너른 마당 한가운데 작은 의

자를 놓고 거기 치마 저고리를 입은 단발머리 계집애가 앉아 있다. 아마

검정 통치마에 흰 저고리일 것이다. 정면의 햇빛이 눈부신 듯 찡그린 얼

굴은 동그랗다. 마치 우리 막내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 마당을 나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변소 가는 마당 한 구석에는 벽오

동나무도 한 그루 서 있고. 어렸을 때부터 결혼할 무렵까지 아내는 죽

그 집에 살았었다. 꽤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어쩌면 또래의 동무들과 함

께 마당에서 공기놀이도 하였을 법하였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벽오동나무 넓은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삼학년 아이들의 모의수학능력시험 감독을 하는 중에 문득 이런 이미지

가 떠올랐다. 여분의 답안지 뒷장에 그것을 적었다. 시의 영감이 떠오르

는 건 세상이 가장 고요한 어느 한 순간이다.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타

고 창밖에 무심히 눈길을 주고 있을 때, 혹은 이른 아침의 화장실에 앉

아 있을 때. 그리고 숨소리 하나도 잡힐 듯 조용한 시험 시간의 교실에서

의 어느 한 순간.

집에 돌아와서 저녁에 그 시구를 꺼내 놓고, 거기에 벽오동나무를 배치

해 보고 공깃돌 부딪는 소리도 넣어 보았다. 계절은 가을이 벽오동나무

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시로 완성되었

다. 썩 마음에 흡족한 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손대기가 싫었다.


측간 가는 길을 비켜서 주춤

키 큰 벽오동나무가

굽어보고 있었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하늘엔 옥돌 부딪는 소리

푸른 가을



벽오동 넓은 이파리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아내는 요즘

어릴 적 벽오동나무보다

굵은 허리로

짧은 가을 볕 낮잠이 달다



이 시에 뭐라고 제목을 붙일까. 참 난감하였다. '아내'라고 하지니 너

무 싱거워지는 것 같았다. '세월'이라는 제목도 떠올랐다. 그것도 별로

내키는 제목이 아니었다. '아내의 가을'이 괜찮을 성싶었다. 그 제목으

로 홈페이지에 시를 올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었다. 제목

이 차라리 맨 아래에 붙는다면 그럴싸하겠지만.

첫 연부터 셋째 연까지는 아내의 유년기이고, 넷째 연에 와서 아내의

현재로 반전을 이루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런

데 제목부터 '아내의 가을'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처음부터 그 다섯 살

난 계집애를 아내의 어린 시절로 금방 눈치챌 것 아니겠는가. '아내의 가

을'은 시상의 반전이 주는 즐거움을 싹 가시게 하는 제목이었다.


'후문(後聞)'이라는 제목이 문득 떠올랐다. 감춰진 반전도 쉬 드러나

지 않고 무난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역시 딱 들어맞는 제목은 아닌 것 같

았다. '벽오동나무가 있는 풍경', '낮잠' 등 이런저런 말들을 뒤슬러보다

가 결국 '벽오동나무 후문(後聞)'을 생각했고, 조사 '의'를 끼워 넣어

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으로 시의 제목을 고쳤다. 그리고 고친 제

목을 홈페이지에 수정하여 올렸다. 별것도 아닌 시인데 제목 때문에 무던

히 애를 먹은 시가 이 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이다.

수필이나 소설에 제목을 붙이기가 시보다 쉽다고 하면 수필가나 소설가

로부터 욕을 먹을까. 시 아닌 산문에서는 단순한 소재를 제목으로 정할

수도 있고, 주제와 관련시켜 상징적인 제목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한

다.


'우편배달은 두 번 벨 울린다'라는 미스터리 소설이 있었다. 소설의 처

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아도 우편배달부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 없이 좀 '별난'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작가 제

임스 케인은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고 나온다. 우리 나라에 수입된 그 영화가 상영되

면서 당시엔 외설스런 장면이 문제가 되어 집배원들이 그 영화의 제목을

고쳐달라고 항의를 하였다. 급기야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 영

화 제목이 바뀌었다.

제목이 없는 시도 있을까. 김영랑의 사행시(四行詩)들은 숫자로 번호

만 매겨져 있지 별도의 제목이 없다. 따지고 보면 '사행시 1, 2, 3…'이

제목일 수도 있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사행시의 앞 구절을

편의상 제목인 양 붙여놓은 것일 뿐이다.


그와 같이 시의 제목을 그 시의 첫 구절을 따다가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런 제목은 대체로 무난한 것이지 썩 좋은 제목은 아닐 것이다.

연작시의 제목 아래에 번호만 매겨진 시들도 종종 본다. 그게 수십 편이

되면 앞에 나온 시들보다 뒤쪽의 시들은 본래의 연작시 제목이 지녔던 주

제와 동떨어질 수가 있다. 연작시가 아니라도 똑같은 제목을 여러 편에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브 본느푸아의 시집을 보면 '돌'이라는 같은 제

목의 각각 다른 시가 여러 편 들어 있는 걸 확인해 볼 수 있다. 제목이

먼저 주어지고 시를 쓰는 백일장과 마찬가지로 시보다 먼저 제목이 쓰여

질 때도 있다. 습작 시절에 연습으로 나도 그런 시를 많이 써 본 경험

이 있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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