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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표성흠/인용 구

오선민 2015. 7. 10. 09:09

시인은 시처럼 살아야 한다. 어떤 것이 시처럼 사는 일인가? 이 질문에는 "시삼백편이면 사무사'라는 공자의 케케묵은 말을 또 한번 인용할 수밖에 없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이 살 일이다. 시는 이 사악함을 이기기 위한 자기수양이다. 시는 말로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말은 곧 그 사람이다. 말 다르고 글 다를 수가 없다. 하여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만고진리가 되는 것이다. 

 

말은 바람이다. 바람은 아무도 볼 수 없다.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그리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지만 풍차를 돌려 충전을 했다가

드디어 전깃불로 만들어낼 때 빛이 빛으로 보이듯 말은 그 말을 글자로 바꾸어 문장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작품이 되는 것이다. 
말은 언어요 작품은 언어의 몸이다. 몸에는 손과 발이 있고 가슴과 어깨 얼굴이 있다. 작품에도 사지와 얼굴이 있다. 뿐만 아니라 혼도 있다. 이 말을 몸으로 바꾸어 혼을 불어넣을 때 시행착오가 생긴다. 얼굴화장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보이듯 애시 당초 보여주려고 했던 건 이 모습이 아닌데 전혀 엉뚱한 게 내비쳐지는 요술거울이 바로 글쓰기의 어려움이라는 것이다. 
생활시나 여행시 쉬운시를 쓰느니 이런 소재들은 차라리 장르를 달리해서 산문으로 표현한다. 최소한 시만큼은 격조를 높이고 싶기 때문이다. 시만큼은 기성품처럼 만들고 싶지 않다. 

 

시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정화, 즉 카타르시스다. 
현대인들은 시보다는 음악이나 마약을 통해 카타르시스의 극치인 엑스타시Ecstasy를 구하려 한다. 혹간 시를 읽더라도 사이버 상에 떠오른 가상공간을 선호하는 독자가 늘고 있다. 오래 생각하기 싫다는 것이다. 

글쓴이와 독자의 피드백이 원만히 이루어져야 한다. 시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산문은 과학적 언어로 씌어졌기에 곧이곧대로 읽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시는 애매모호한 점이 많아 이해가 어렵다. 그게 시의 특성인데 그 부분은 상상에 맡겨야 - 아! 하먼, 어! 하고, 손바닥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듯 - 하는데도, 독자의 상상력 부족으로 온전한 시 읽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다
시는 가슴으로 쓰고 깨우게 하는 소설은 머리와 손끝으로 쓴다. 둘 다 엉덩이 싸움이다. 그만큼 시간을 요하는 중노동이다. 쓰기의 어려움이다. 당연히 읽기에도 어려움이 뒤따라야 한다. 

시는 생략되고 압축된 표현과 상징성을 그 생명으로 하기에 공부하지 않고서는 감상할 수 없게 된다. 피드백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만들면 될 것 아니냐하여 '쉬운시'라는 게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런 시는 한번 읽고나면 다시 읽고 싶은 깊은 맛이 없다는 것이다. 내용을 다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시는 내용을 알기 위해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는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느낌의 전달이다. 시의 포인트는 압축과 상징이다. 

압축과 상징성을 숨기고 풀어내는 일이 시 쓰기와 시 읽기라 한다. 
시詩는 말씀 언言자에 절 사寺자가 합성된 글자다. 말씀의 집이라는 뜻이다. 법어法語라는 말이기도 하다. 법어는 함부로 읽고 새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는 시인이 절반을 쓰고 읽는 독자가 그 절반을 채우며 읽어야 완성품이 된다. 그러한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그 골치 아픈 숙제까지를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억지라는 반발이 쏟아져 '쉬운시'가 태동되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어려운 시'와 양분되었다. 아마도 지금 대다수 발표되고 있는 시는 쉬운시에 속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학의 흐름을 모른다면 시의 재미보다는 글자만 읽어 내려가는 꼴이 된다. 따라서 공부가 필요하다. 독자에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시는 짧아야 한다.
시는 산문이 아니기 때문에 시다. 산문의 영역과 시의 영역은 구분 지어져야 한다. 아무리 산문시에 내재율이 있다해도 운율만을 가지고 시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시를 쓸 필요 없이 산문을 쓰면 될 일이다. 모든 게 혼용되어 장르 구분도 불필요한 불확실성의 시대이긴 하지만 시는 시로서의 자리매김을 다시 해야 한다. 형식의 문제다.

시는 한번 읽고 치우는 글이 아니다. 
음악을 듣고 또 듣고 하듯 그림을 한 자리 걸어두고 보고 또 보듯, 시 역시 음미하고 또 다시 음미할 때 제 맛이 나는 것이다. 쓸 때도 그렇게 시적 장치를 해야 하고 읽을 때도 그렇게 갉아먹듯 읽어야 한다. 일회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때문에 시집은 사서 읽어야 하고, 취향에 맞는 시인을 골라 두고 차 마시듯 음미할 때 제 맛을 알게 된다.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훌떡 읽는 책 하고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서가에는 그저 몇 권 시집 애송 시인이 있어야 한다
시는 내 고장 내 나라 말로 내 마음과 내 시대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이 거울은 때가 묻으면 보이지 않게 된다. 거울을 닦는 일은 시인과 독자가 함께해야 할 작업이다. 야! 하면 호! 하는 산울림처럼 의기투합하는 시인과 독자가 만나 행복해야 한다. 

나는 많은 독자를 원치 않는다. 
많은 독자를 위해서 시를 쉽게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단 한 사람의 독자일지라도 내 시를 읽고 느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느낌은 슬픔일 수도 기쁨일 수도, 행복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느낌으로 살아가는 일에 어떤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독자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크나?




 

출처 : 저, 몸 달음
글쓴이 : 동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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