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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잘 익은 사과/ 김혜순

오선민 2015. 10. 4. 09:21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년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시집『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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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순 시인은 자신의 수필집에서 시인을 '자신의 아픔을 모셔놓고 그 아픔을 향해 춤을 추는 사람'이라며,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몸속에 모셔놓고, 어르고 축제를 벌여주며 때맞춰 제사를 지내주는 사람이다. 시인은 그 아픔이 싫어 도망가다 도망가다 병든 사람이지만 그 아픔을 제 서방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이다. 시인은 밤마다 밤마다 어둠을 붙들고 아픔을 맞으러 산에 오르는 사람"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시인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바라본 일상의 풍경들을 시계물레처럼 '치르르치르르' 돌리며 아라크네가 되어 한 여성의 탄생과 죽음까지를 모두 보여주려 한다. 자전거 바퀴 같은 인생이 둥근 사과 한 알로 대치되고, ‘잘 익은 사과’가 사각사각 깎이는 동안 시간은 아가에서 처녀와 엄마로 이어져 할머니가 되는데, 마침내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잡수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인생은 과연 잘 익은 한 알의 사과 같은 것이고, 종래에는 자신의 낡은 잇몸으로 이를 오물모물 다 파먹고 가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신체기관의 감각이 총동원된 이 시에서 자신의 아픔을 몸속에 모셔놓고 어르고 축제를 벌이고 제사를 지내주는 모습은 진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삶에서 반복되는 순환의 세계를 조화로운 우주의 형상으로 잘 담아내 보여주는데, 언제나 그렇듯 발랄한 상상력과 언어의 탱글탱글한 감각이 참으로 매혹적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어린 자식을 먼 나라로 입양 보낸 '처녀 엄마'였으리란 생각이 미치자 김혜순의 동화적 상상력과 통찰은 더욱 돋보인다. 시를 잘 좀 써보겠노라고 마음먹은 여성 시인치고 김혜순을 텍스트로 삼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오랜만의 좋은 생각인 양 나도 냉장고에서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가져와 숟가락으로 파내 어머니께 드렸다. 부실한 이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며 조금씩 정신을 놓으시는 어머니의 가을이 짠하다.

 

 

권순진

 

 

Dreaming Of Home And Mother - Chen Rong Hui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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