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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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강인한시인 시 모음

오선민 2010. 5. 13. 07:42

 

임진강 / 강인한


1
괴로운 빛깔을랑
가슴으로 문지르자.

찢기운 나랫자락
강물은 굽이 흘러

나비의 나랫짓 위에
선연한 종, 종소리.

2
차라리 한 그루의
나무로나 서볼거나.

나비가 내다보는
가슴 안의 바람 속을

피 먹은 울음빛으로
떠오르는 산하(山河)여.

3
별들이 물에 잠긴
잿빛 강물 굽이에는

꽃내음 흩뿌려져
촉수마다 젖는 비원(悲願).

뒹구는 탄피(彈皮)의 울음
한결 맑은 사랑아.

4
눈 멀은 땅이런가
울음빛 타는 하늘.

울려라, 종을 울려
기폭인 양 퍼덕여라.

해와 달 흐르는 강을
강을 넘는 나비여.




*1967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 수석 당선작

 

 



 

 

 

 

 

 

당신 앞에서 / 강인한


나의 위치는 화분
산하가 다 보이는 곳이다.
나의 향함은 다만 결실
목숨의 마디마디를 끊어 강물에 띄워 보내는 일이다.

푸르른 바람 앞에 서면
나는 기가 된다. 펄럭인다.
애련과 사랑으로 가득히
스치는 풍경에도
펄럭인다.

바람 속에 나부끼는
나의 팔다리에서 움이 돋아
나의 온몸에 비늘이 돋아
서걱이다가
그 하나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나는 발가숭이로 선다.

떨어져나간 나의 분신들은
천 조각 만 조각 고향의 하늘 속에서
데모를 하고
유서가 되고......

하루의 피곤한 눈물이
줄줄이 흐르는 꽃
그래 나는 당신 앞에서 울음을 참으며
울음빛으로만
핀다.

높은 바람 속에서는
때로 기가 되어 보기도 하나
당신 앞에 서면
끊어도 끊어도 죽지 않는
목숨이 된다.

내가 밟아온 길에서는
흙먼지만 날리고
언제나 계절이 없던 것을.

나의 모국어는 강
흙탕물이 붉게 흐른다.
밤마다 밤마다 골수에 흐르는 붉은 눈물처럼,


* 196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가작 입선(당선작 없음).

 

 



 

 

 

 

 

 

전라도여, 전라도여 / 강인한


1

거덜이 난 고향,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유창한 서울말을 구사하러
친구는 서울로 가버렸지.
컬컬한 막걸리를 버리고
드는 낫을 버리고 친구는
도시로 나가 운전을 배우고 맥주도 홀짝이고
그리고는 택시 운전수가 되었지.
월남에 가서 아슬아슬한 목숨을 달랑이며
친구는 달러에 맛을 들이곤
변해버렸지.

거덜이 난 고향,
사우디 아라비아로 더러는 아주아주 멀리
서독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버리고
전라도는 누가 지키나.
차마 못 버리는 에미 애비의 땅에 서서
한 그릇 찬밥덩이 앞에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굴을 배우고
양심 같은 맹물을 마시며
불러볼 노래도 없이
고개를 수그리네.
전라도여, 전라도여.

2

이 나라의 가장 후진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흐르는 곳
백 년을 질척이는 갯땅이여, 오 갯땅이여.
황산벌에서 찢어진 마지막 깃발이여.
무너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땅에서
나는 차라리 무너지고 싶구나.
아편꽃 빠알갛게 타는 백제의 해를 보며
황해로 지는 해를 보며
오월에 나는 무너지고 싶구나.

할머니는
정화수를 떠놓고 신새벽에 빌었지.
구리 궤짝 속에 엽전 꾸러미 시퍼렇게 녹이 슬도록
빌고 빌었지.
갑오년 난리 속을 뛰쳐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지.
고부 두승에 봉화가 오르고
갈재 갓바우에 봉화가 오르고
무돌에도 계룡에도 봉화가 오르고
휘황히 빛나는 함성 소리에 귀가 먹어
할머니는 귀머거리가 되었지.
황토마루 슬픈 파랑새 울음
할머니는 이냥도 귀머거리.
새야 새야
울지 마라.

3

아버지가 끄을려 가고 있었지.
먼 데 개짖는 소리 속으로
그 어둠 속으로 아버지는 끄을려 가고 있었지.
우리사 아무 죄도 없응게,
걱정 마라, 후딱 오마.
어머니는 행주치마로 우리를 포옥 감싸고
울고 있었지.

총소리, 폭격 소리에
돌담 위의 호박 잎새 숨죽이는 여름날
강변엔 뙤약볕만 먹고 자란 뱀딸기
핏빛으로 핏빛으로 익고 있었지.

전라도여, 전라도여
발길질에 채이고 피 흘리다가
밤을 도와 달아나온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까칠한 턱수염
내 뺨을 비비고 부르르 떨리더니
먼 데서 개짖는 소리 들리더니
귀신들 도깨비들, 수지니 날찌니
해동청 보라매 훠이훠이 다 날아가버리고
개짖는 소리 데불고
밤 늦은 길을 이제는 내가 돌아가네.
시들은 바람 속을 내가 돌아가네.

4

시름 많은 사람들의 흥얼거림
저 바람 속에 들리는 것을.
설움빛까지 드러난 황토 흙에 부리를 씻고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열 굽이 스무 굽이
바람도 목이 쉬고
검게 탄 바윗돌이 울먹이는 산마루
철쭉꽃 같은 철쭉꽃 같은
봉화가 오른다.
한 무더기 철쭉꽃이 타오른다.
북소리, 고함 소리
관솔불 높이 이글거리는 밤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녹두꽃 흐드기는
샛바람을 따라 새털구름을 따라
짚신발로 뛰어가던 황톳길
할아버지 죽창 들고 거꾸러진 벌판,
나이 어린 빨치산이 부르튼 발을 안고
숨 거둔 골짜기, 새야 새야
울어라 새야.

5

산 적적, 흰 그리메
불 같은 그리움을 다스려
칡넌출 벋어간 곳,
전주에서 솜리까지 밤길 칠십 리
칼날 선 내무서원 눈길을 피해
달아나온 아버지의 맨발
삼베 잠뱅이, 거뭇한 수염 그리워.

지금은 비어 있는 마을
젊은 놈들은 도시로 가고
잘난 놈들은 돈벌러 가고
약은 놈들은 등을 치러 가고
쑥떡만 남아서 지키는 고향.
웃으면 눈이 이쁜 가시내들
과자 공장으로 다방으로 술집으로
더러는 밑천도 팔러 다 떠나가버리고
비어 있는 마을에 햇살은 고와
어어이 부르면
어어이 뒷소리로 넘기던 모내기는 누가 하나.
전라도여, 전라도여.

만세 만세, 만세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던 할머니의 삼월도 가고
사월도 가고
슬픈 오월 하늘.

6

발치에 섬진, 영산강을 두고
제 설움에 돌아눕는 만경, 금강을 다둑이고
크막하게 갈재가 뻗쳐
솟은 재를 넘는 옛날도 옛날
소금 장수 시드러진 가락에
무더기 무더기 찔레꽃도 피고
산도둑놈 거친 숨소리에
소쩍 소쩍 새도 울어라.

달하
먼 발치로 내다보고 섰는
혼곤한 꿈빛의 고향이여.

이 나라의 가장 후진 백성들의 한숨이
모여서 삭는 곳
오늘도 질척이는 갯땅, 오 갯땅이여.
한 그릇 찬밥덩이 앞에들 놓고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고
그래도 남은 사람들끼리
꿀꺽꿀꺽 돌려 마시는 한 사발의 찬물
시리고 아픈 이 나라의 어금니여.

*1982년 제5회 『전라도 시인』시집으로 전남문학상 수상 수상

 

 



 

 

 

 

 

 

 

 

 

 

 

 

 

대운동회의 만세소리 / 강인한


여기서는 세기의 어둠을 톱질하는 소리가 잘 들린다. 아주 잘 들린다.


폭풍 더미의 사이렌이 병사들의 가슴을 후벼팔 때
땅굴 속 그는 수정 같은 설편(雪片)을 보았다.
겨울이 없는 땅에서, 그의 고향은 퍼얼펄 솟아오르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균열진 음색으로 노래하라,
화약을 먹고 피는 꽃이여
귀기 서린 진홍의 꽃이여.

그때 그가 마지막 본 음울한 하늘에서는
문명한 새들이 날고 있었다. 새들은 비명보다 진한
폐허를 교미하고 있었다. 그것은 암벽을 녹이는 뜨겁고도 뜨거운 정염이었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비취로 물든 건강한 하늘 아래에서 모자를 제껴 쓰고 말을 달렸다. 북소리 북소리,
땀 젖은 환호성을 펄럭이며 둥둥 두둥둥 울리는

북소리, 쇠북소리, 달리는 말굽소리 아편꽃이 흥건한 대지에 드넓은 만주의 호밀밭에
울려퍼지는 고구려의 고동소리.


흥정을 마친 상선은 돌아오지 않고
남지나해 더운 몸부림이 잠을 쫓는다.
해안을 껌벅이는 새들의 붉은 눈빛이 머루알처럼 익어만 가고

아름드리 기둥을 향하여 벌떼처럼 아이들은 모여들었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사탕엿보다 달고 맛난 고함에 묻혀
그는 눈부신 태양을 이마에 댄 채 팔을 벌렸다.
그 가늘고 세찬 팔뚝에 엉겨붙은 평화를 힘껏 포옹했다.
몸채만한 기둥은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조국은 조금씩 그렇게 균열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고원을 치달리는 우람찬 승전고,
뽀얗게 날리는 햇빛가루를 몸에 칠하고 삼림처럼 무성한 고구려의 사내들 ......


삼림처럼 무성한 우계(雨季)가
그의 우러른 눈망울에 어리우고

휴전 고지의 캐터필러 자욱마다 쑥꽃이 피었다 지고
엄청난 사연으로 초병은 울고 있었다.
짐승처럼 울고 있었다.
유성(流星)이 가만가만 어깨에 내려앉는 겨울 하이얀 눈구렁 속에서
조국은 떨고 있었다.
겨냥해야 할 진정한 적(敵)이 없는 지도 위에 엎드려
초병은 비운을 울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무감각한 함성과 파도와 잘못 말려들어간 꿈속에서처럼
그는 비운의 상처를 끄을고 포복해 갔다.
이글대는 태양을 이마에 느끼고, 그가
드디어 곤두서 있는 기둥나무를 끌어안았을 때

내뻗은 두 손은 갑자기 가지를 쳤고, 그리하여
수많은 촉수를 지닌 벌레가 되어 그는
태양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서서히 그 아름드리 기둥나무는
그의 치미는 힘에 의하여 굴복하였다.
둥둥 울려 퍼지는 함성은, 북소리는
이내 그의 뜨거운 맥박이 되어 기운차게 뛰놀았고,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그때 그는 보았던 것이다.
어두운 남지나의 적의에 찬 땅굴 속에서
꿈틀거리는 고향의,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하이얀 설편을 보았던 것이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 쏟아지는 북소리보다 흰 고향의 눈을.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끊임없이 해안선을 날며 불꽃 같은 새들은 교미를 하고
끊임없이 세기를 절단하는 톱질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균열진 음색으로 노래하라,
화약을 먹고 피는 꽃이여
귀기 서린 진홍의 꽃이여.

그 힘찬 고구려 사내의 포옹은 끈끈히 굳어버리고
비린내를 풍기며 그는 한 마리의 갑충이 되어 자빠지고 말았다.

톱질소리는 더 크게,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폭풍 더미의 사이렌을 항상 불어대는
조국의 새하얗게 눈 덮인 군사분계선의 어느 초소에
유성이 가만가만 내려앉을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의 고원에도
아름다운 겨울이 반짝일 것이다.
어디선가 병사는 조국을 어깨에 메고
비운을 겨냥할 것이다.
짐승처럼 몸부림칠 것이다.


먼 데서도, 선택된 전쟁이 끝나가고 있는 아주 먼 데서도
세기의 어둠을 톱질하는 소리는 잘 들린다. 아주 잘 들린다.

대운동회도 저물고, 즐거웠던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도 이미 저물고
아이들의 만세소리만 스산하게 스산하게 파도에 씻기운다.


*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겨울 안면도 / 강인한


돌아가기에는 해가 너무 짧은 오후
이제 곧 밤이 온다

다급하게 지나쳐 온 수목원의 솔숲에서는
죽었던 바람이 이빨을 세울 것이다
해변의 횟집 진열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식당 밖으로 내민 천막의 멱살을 뒤흔들 것이다
가을 밤 바닷가 모래톱에 나가본 적이 있다
갯우렁이 빨아먹고 놓아준 구멍 난 조가비들
녹슨 기억처럼 달빛 아래 뒹굴고
떠밀려온 해초가 낡은 그물이 되어 말라 가는 시간
소주 한 잔에 순하게 달이 뜨고
두 잔 석 잔에 파도가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밤을
기억한다 멀뚱멀뚱
제 살점을 한 점 두 점 집어먹는
젓가락을 뻐끔거리며 바라보는 눈
깨끗한 접시 위 생선의 발라낸 생살을 씹으며
오늘을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겨울 바다는 왜 이다지 산보다도 높고 추운 것이냐

밖에 나와 찬비 맞은 개처럼 떨며
돌아보니 나는 이제 너무 멀리 와버렸다

 

 



 

 

 

 

 

 

 

 

 

 

바람이 센 날의 풍경 / 강인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플라타너스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바람 속에 서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으려고 몸을 떨며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흘러가 버린 저녁 구름과 매캐한 소문과
매연과 뻔한 연애의 결말들은 길바닥에 차고 넘쳐
부스럭거리는, 창백한 별빛을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
때 이른 낙엽을 떨군다
조바심치면 무엇하느냐고
지난 겨울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나무들은
눈을 틔우고 잎을 피워서 파닥파닥
할 말이 많은 것이다 할 말이 많아서
파닥거린다 춤을 춘다
물 건너간 것들, 지푸라기들 허공을 날아
높다란 전깃줄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소스라치는
저 검은 비닐들을
이제는 잊어야, 잊어야 한다고
빗금을 긋고 꽂히고 내려꽂히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러져버린 진보와 개혁 그 허깨비 같은 잔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비리고 썩은 양심은 아래로 잦아들어
언젠가는 뿌리 깊은 영양이 되겠지만
뭉칫돈을 거래하는 시궁 속의 검은 혀
아무 데서나 주무르는 시뻘건 후안무치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많아서 상처투성이의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나무들은 바람 속에 아우성치는 것이다

 

 



 

 

 

 

 

 

 

 

밤의 메트로 / 강인한


소리가 열차를 끌고 간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 밤을 끌고 간다
칸칸이 불을 밝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소리에 끌려 구불구불 미끄러지는 열차
나는 얌전한 소리의 입자처럼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강을 지나는지 소리가 더욱 거세어지고
푸른 밤하늘 위에
열차의 내부가 환하게 떠 있다
멀리 가로등이 흘러가는 야경 위에
곁에 앉은 젊은 여인의 얼굴이 겹쳐진다
소리가 문득 사라진다
옛날에 잊어버린
젖은 이름 하나가 비누방울처럼
밤하늘에 켜졌다가 사라진다

 

 



 

 

 

 

 

 

 

 

 

 

 

잔다리목에서 싸리재까지 / 강인한


잔다리목에서 싸리재 쪽으로
파란 하늘에 초승달이 길을 내고 있었다

쌀 씻는 소리를 내며
차가운 별들이 기울었다

조는 듯 깜박이는 별빛을 핥으며
문간에서 포도가 익어가고
추녀 끝에서인지
수런거리는 포도 넝쿨 아래선지
하얗게 여치가 울었다

쌀 씻는 소리를 시늉하며
여치가 숨어서 울었다

잔다리목에서 싸리재까지
궁금한 소식이
하늘에 걸려서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聖者 / 강인한


오목눈이
붉은머리오목눈이 작은 둥지
눈물 찔끔 알을 낳았는데
하늘빛 제 설움으로 낳았는데

뻐꾸기가 몰래 떨구고 간
하늘빛 둥근 알
눈도 못 뜬 고 벌거숭이가
등으로 등으로 오목눈이 알들을 밀어내네
밀어내서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네

가엾어라
제 새끼들을 죽인 뻐꾸기 새끼인데
오목눈이 먹이를 물어다 먹이네
그나마 목숨은 한 가지라고
제 몸집보다 훌쩍 큰 남의 자식을
오목눈이 지성으로 먹여 살리네

 

 



 

 

 

 

 

 

 

 

 

살구나무 아래 / 강인한


살구나무 한 주가 탱자울타리 안에 서서
연년생으로 아이 셋을 낳고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리 식구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침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지
그리고 어느새 봄이 가는지도 모르게
도랑물에 귀를 적시고
문 밖에서 보리가 익어갈 때
스스스 바람소리를 내며
보리까시락은 아기 업은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싶어하였다
낮은 굴뚝에서 삭정이를 때는 굴풋한 연기
마당에 구름처럼 퍼지는
가을 해거름이 나는 좋았는데
사르락사르락 격자문의 창호지에
깊은 밤 눈발이 부딪는 소리를 손에 쥔 채
젖먹이를 안고 잠든 아내는 왕후의꿈을 꾸었다.

 

 



 

 

 

 

 

 

 

가을의 참회록 / 강인한


은행나무가 한 해 동안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빛깔을 빚어
하나 둘 떨어뜨린다
지상의 길을 천국인 양
금빛으로 덮어준다
사람보다 키 큰 저 나무에게
미안하여라
내 발로 이렇게 무참히 밟고
지나가도 되는 것인지

 

 




 

 

 

 

 

 

 

 

 

 

아랫것은 불편하다 / 강인한


쉬 잠들지 못하는 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모로 누워 칼잠이라도 청해 보는데
오른다리 아래에 깔린 왼다리가
무심결에 뻐근해진다
고개를 돌리면 왼다리 아래의 오른다리가
은근히 불편해진다
잠든 아내의 다리 위에 슬그머니
내 다리를 얹어보았더니
하하 이렇게도 내 온몸이 세상없이 편안하고
깃털처럼 가벼울 수가
하지만 잠결에도 아내는 기를 쓰고 밀쳐낸다
바위처럼 무겁고 답답하다면서
끙끙 용을 쓰며
내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걸쳐 온다
아이고 그렇구나
나무 뿌리 위에 나무 뿌리가 포개어져도
눈 위에 눈이 쌓여도
그림자 위에 그림자가 겹쳐져도
아랫것은 아무래도 위엣것의 반성 없이는
하염없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을
윗물 밑의 아랫물도
그래서 천근 만근 무겁게 흐르는 것을.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 강인한


사람 사는 일이란
오늘이 어제 같거니 바람 부는 세상
저 아래 남녘 바다에 떠서
소금 바람 속에 웃는 듯 조는 듯
소곤거리는 섬들
시선이 가다 가다 걸음을 쉴 때쯤
백련사를 휘돌아 내려오는 동백나무들
산중턱에 모여 서서 겨울 눈을 생각하며
젖꼭지만한 꽃망울들을 내미는데
내일이나 모레 만나자는 약속
혹시 그 자리에 내가 없을지 네가 없을지
몰라 우리가 만나게 될는지
지푸라기 같은 시간들이 발길을 막을는지도
아니면 다음 달, 아니면 내년, 아니면 아니면
다음 세상에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겠지
일찍 핀 동백은 그렇게 흰눈 속에
툭툭 떨어지겠지
떨어지겠지 단칼에 베어진 모가지처럼
선혈처럼 떨어지겠지
천일각에서 담배 한 모금 생각 한 모금
사람 사는 일이란
어제도 먼 옛날인 양 가물거리는
가물거리는 수평선, 그 위에 얹히는
저녁놀만 같아서.

출처 : 원주문학
글쓴이 : 서봉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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