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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외 1편) / 진은영

오선민 2010. 5. 23. 20:43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외 1편)

 

   진은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 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 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라고 대접해주는 예절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밀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하면서, 그 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 거

어릴 적 소풍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 놓았나 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학사상》 2010년 4월호

 

 

영화처럼

 

 

 

너와 나 사이

무사영화에 나오는 長劍처럼

길고 빛나는

연애담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로맨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살구나무숲에 무심코 떨어뜨린

에메랄드 반지처럼

어떤 이웃 청년도 우리가 분실한 손가락을 찾아주지 않았다

 

음악영화에서처럼

어린 너의 재능을 알아볼 가정교사는

빈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지 않았다

(너는 기다리다 지쳐 그만 늙어가려 하는데)

 

아름다운 선율들은

우리의 부드러운 녹색 목에 걸리기도 전에

모든 시도들은

끊어진 진주 목걸이처럼

희미한 바닥으로

쏟아졌다

탐정영화처럼

범인인 우리가 어디로 도망치든

찾아내는 죽음이 있을 뿐

 

자막이 올라가고 어둠 속에서

공허가 커다랗고 흰 입술로 아우성쳤다

무성영화 여배우의 과장된 표정으로

 

악당들, 악당들, 악당들

 

 

                                                 —《현대문학》 200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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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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