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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외 2편) / 고영

오선민 2010. 5. 23. 20:38

〈질마재해오름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외 2편)

 

   고 영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에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줄 수만 있다면

반짝이는 눈물도 말랑말랑

시린 꿈도 말랑말랑

 

 

고라니

 

 

 

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설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네 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늘 위에서 숨통을 조여 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몹쓸 짓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삼겹살에 대한 명상

 

 

 

여러 겹의 상징을 가진 적 있었지요

언감생심, 일곱 빛깔 무지개를 꿈꾼 적 있었지요

불판 위에서 한 떨기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 있었지요

 

흰 머리띠를 상징으로 삼았지요

피둥피둥 살 바에는 차라리

불판 위에 올라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요

육질이 선명할수록 사상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요

달아오른 불판이 멀리 쏘아 올리는 기름은

발가벗은 내 탄식이었지요

 

몸 뒤틀리고 몇 번쯤 뒤집혀지고 나면

(제발, 세 번 이상은 뒤집지 마세요)

내 사명도 끝난 줄 알았지요

노릿하게 그을린 얼굴들이 참기름을 두르고 앉아

마늘처럼 맵게 미소를 주고받을 때

소원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저 말라비틀어진 살점들을 어찌할까요

 

어쩌다 간혹 안부나 물어봐주세요

그러면 나는 그냥

무지개를 꿈꾸다 죽은 한 마리 돼지의 어쩔 수 없는 옆구리였다고,

불판 위의 폭죽이었다고,

웃기는 돼지였다고 웃으며 말할 날 있겠지요

 

 

                                      — 시집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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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 1966년 경기도 안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3년 《현대시》에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외 2편으로 신인상 등단. 2004, 2008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 받음.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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