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난 곰이고 싶지/ 유강희 본문
난 곰이고 싶지/ 유강희
난 말이지
쑥 열 동이를 먹고
마늘 닷 섬을 먹고
다시 곰이 되고 싶지
사타구니가 칡잎처럼 풋풋한 검은 곰이고 싶지
그중 억센 소나무 둥치에 텅텅 등을 치고
그중 큰 바위에 탁탁 발바닥을 두들기며
미련하지만 뚝심 좋은 노래를 크게 크게 부르고 싶지
시퍼런 식칼 하나 들고
내처 논두렁 밭두렁을 먹어들어가면
쑥은 우리나라 어느 한 곳 안 남아돌 것 같지만
쑥처럼 무장무장 자라고 저를 퍼주는 것도
세상엔 드물어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는 부신 봄날
난 사타구니가 앞들만큼이나 넓은 곰이고 싶지
싱싱하고 달콤한 벌통만을 깨먹는 곰의 여자이고 싶지
그래서 허벅지가 통통한 밭두렁을 낳을 거야
가슴팍이 기름지고 찰진 논두렁을 낳을 거야
궁둥이가 큰 옆집 암소를 낳을 거야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벌일 만큼 큰
교회보다 절보다 웅장한 마을회관을 낳을 거야
옛이야기를 풀듯 나를 닮은 곰새끼를 줄줄이 낳을 거야
쑥을 캐다보면
어느새 온몸에 쑥물이 들고 쑥내가 나고
불탄 자리에서 난 쑥은 더욱 눈물겨워
우리나라 옛 여인들의 눈물을 아로새긴 듯
함부로 어린 쑥의 밑동을 따내지 못하는데
어디선가 풀피리 불며 오는 가슴이 큰 곰여자
- 유강희, 『오리막』수록
출처 : 원주문학
글쓴이 : 서봉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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