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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詩가 내게 찾아오는 때 / 고재종

오선민 2010. 6. 9. 08:46

 

詩가 내게 찾아오는 때

                                  고재종 시인


시가 내게 찾아오는 때. 좀 특이한 주제 같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칠레의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파불로 네루다의「詩」라는 시를 읽어보자. 이는 오늘 주제의 서문쯤 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 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 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 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 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 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 것 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 린/ 하늘을,/ 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 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 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한 존재는 / 그 큰 별들 총총한/ 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 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시가 내게 찾아오는 때가 있다. 아무리 내가 시를 찾아가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데 문득 시가 나를 찾아오는 때가 있다. 어디서,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겨울에서도, 강에서도 아니게 목소리도, 말도, 침묵도 아닌 채로 나를 찾아와 나를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유독 나만을 불러 격렬한 불 속으로 나를 빠뜨리는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입이 막혀 모든 것의 이름을 대지 못하고, 눈은 멀어버린다. 그럼에도 내 영혼 속에선 뭔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 탓인지 열이 나고 잃어버린 날개가 다시 돋는 것 같다. 그런 감정으로 결국 느닷없이 찾아온 그 불이 무엇인가를 해독하며 어렴풋한, 뭔지 모를 첫줄을 쓴다. 그것은 순전한 넌센스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모른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첫줄을 쓰며 나는 문득 본다. 그야말로 씻은 듯 환하게 풀리고 열린 하늘을을 본다! 흐르는 별들을 본다! 한마디로 새로운 開眼이다. 그러니 곡식으로 고동치는 논밭인들,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신 삶의 경이와 비애인들, 또 무슨 생생한 것들이 마구 휘감아 도는 밤과 우주인들 어찌 보이지 않으랴. 끝내 나, 이 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별들과 더불어 구르고 바람에 심장은 풀리며 그 신비한 宇宙律 속에 취해버린다. 이 얼마나 큰 황홀인가, 아 얼마마한 장관인가!
이와 같은 네루다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도 늘 시가 찾아온다. 나는 이제 여러 시인들의 구체적 시를 통해 시가 어느 때 찾아오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포착하여 시적 형상화에 성공을 이룰 수 있는지를, 내 나름의 시적 경험과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1. 전율 ; 경이와 슬픔

네루다도 처음 시가 찾아왔을 때 격렬한 불 속의 감정을 느끼며 입이 막히고 눈이 멀어버리는 경험을 했는데 바로 이것이 ‘전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강은교 시인은 이 전율을 예술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표준국어사전에는 전율을 “몹시 무섭거나 두려워 몸이 벌벌 떨림”이라고 정의하여 그 일면만을 표현하였는데 이러고서 어찌 한 나라의 사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전율은 그렇게 공포스러울 때도 오고, 너무 경이로울 때 느낄 수도 있으며, 격렬한 분노나 너무 깊은 슬픔의 때도 올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어디서 전율을 느꼈다는 건 그것의 정서와 내 정서가 부딪히면서 정신의 스파크를 일으키고 그 합일됨을 핏속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것은 아주 강렬하다. 좀더 부언하면 내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던 그 어떤 것에 그것이 자기의 極線을 갖다 댐으로 말미암아 전율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전율은 나의 잠재된 그 무엇을 그 순간 顯在化시키라고 충동질하고, 그 충동질을 따르면 우리는 시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 전율은 나에게 있어선 너무 경이로워서 온 몸과 마음이 환히 열리는 때나 너무 슬퍼서 명치끝이 심한 통증과 함께 꽉 막혀버릴 때 많이 찾아온다.
어느 시인은 그런 경이가 옥상 위의 빨랫줄에서 하얀 기저귀가 햇빛과 바람에 눈부시게 빛나며 날릴 때 찾아온다고 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한 정성과 그 아이에게 열릴 싱그러운 미래가 그 눈부시게 빛나는 기저귀 속에 내포, 함축되어 있어 그 누구라도 그걸 보면 생의 의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간 수많은 경이가 찾아왔는데 그 중 아직도 안 잊혀지는 것들 중의 하나가 있다. 대숲에 별이 벌써 부서지기 시작하는 때, 들에서 늦게 돌아온 어머니가 바가지에 쌀을 씻는 소리다. 하루종일 뭐 별로 먹은 게 없어서 배는 고프지, 땅거미는 밀려오지, 그런데도 기름 닳아진다고 이른 저녁부터 등을 못 켜게 하니 마루는 어둡지, 늘 들일에 쫓기는 어머니는 돌아올 줄 모르지, 한마디로 ‘기다리다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어가는데’ 그때 부리나케 달려온 어머니가 대밭 밑 샘가에서 보리쌀이건 수수건 쌀이건 바가지에 담아 그걸 씻는 소리는 한마디로 어둡던 세상이 환하게 열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별빛이 부서지는 대숲의 일렁이는 소리였고, 이윽고 가마솥 아궁이에 솔가지 불이 환하게 타오는 소리였다.
나는 때로 세상엔 경이가 가득 차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것은 나의 천부적인 성격에서도 기인한 생각이지만 시를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이 가져다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인간의 비극주의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일상 속에서 건지는 이런 소중하고 고귀한 경이들 때문에 그런 대로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과 이로 인한 충격 등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천양희 시인이 어느 날 들고 나왔던『마음의 수수밭』이란 시집은 그야말로 경이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시집이다. 그 중 비 갠 어느 여름 한 때 두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생생한 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고 외치는 시「여름 한때」나 시인 이상희의 딸 새록이를 어느 시인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보고 “새록새록 피어나는/ 초록잎 같은 새록이/ 하늘 아래 아이처럼/ 뿌리 깊은 나무 보았는가”라고 외치며 그만 “새록이를 안는 순간/ 어, 버, 버, 반벙어리가 되었다”는 시「새록이」와 그리고 다음의『직소포에 들다」는 경이의 절창이다.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고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 은― 바위들이 몰래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배운다

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직소폭포를 보고 쓴 이 시를 보면 그것을 본 경이의 순간이 시인의 안에서 끓고 있는 그 무엇에 극선을 갖다대며 전율을 일으킨다. 그러다 보니 “와!” “백색 淨土!” “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이란 영탄법이 절로 동원될 수밖에 없다. “명창의 판소리 완창”으로 비유된 폭포소리가 더 나아가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소리로까지 극대화 된 것은 감정의 남발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음의 환희와 싱그러움이 너무도 철철 넘쳐 시가 마침내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버린 경우다. 그러나 김남주 시인이 거듭 감탄했다는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는 구절은, 산길에서 만난 다람쥐 새끼의 맑은 눈빛을 보고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어린것」)는 나희덕의 시구절과 함께 그 고요한 경이가 우주를 밝히고도 남는다.
경이에 가득 찬 천양희 시인의「한 아이」란 시를 더 보자.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 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 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것들
샛강에서 놀러 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천양희 시나 나희덕의 시나 ‘어린것’들을 보는 경우에 많은 경이가 일어나는데 아마도 이는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세상 구원의 힘인 모성의 강렬한 발현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오늘 과학기술과 자본 문명, 그리고 이성주의의 최첨단적 추구 속에서 김춘수의 시구대로 신은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 되어버리거나 최승호의 말대로 돈만 넣으면 “신의 오렌지 쥬스”를 주는 “십자가를 세운 자동판매기”가 되어버리고, 문화 예술은 그 작품이 판매된 숫자로 등급이 매겨지거나 욕망과 섹스 등 말초적 감각만이 판매되어도 문화산업적 시각 속에선 큰 대접을 받는 속류 상품의 시대, 그리고 정치는 민주주의랍시고 폭로와 비방과 비리와 부패나 확대재생산하는 권모술수가 되어버리고, 경제는 끝없는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 구조를 공고화하는 세상에서 도대체 경이로운 것이란 무엇이며 과연 우리가 무엇을 보고 경이로워 할 것인가. 고통과 고독은 참을 수 있지만 속류 상품들만이 활개를 치며 온 거리를 누비는 세상 속에서 마지막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사라져 버린 지경에 그나마 시인마저 천박해져 버린다면 세계의 비밀과 그 경이를 누가 보여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이시영 시인의 시집『무늬』또한 우리에게 참다운 경이를 가르쳐 주는 좋은 시집이다. 그는 “이 도도한 의미 과잉의 시대에 나는 내 시가 그것에 편승하지 않고 그냥 잔잔한 물결 무늬이기를 바랐다. 내 마음의 결이 그대에게 닿아 낮은 잎새처럼 조금 살랑거리다가 마는. 참다운 노래는 그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 적는 일.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느냐고 묻지 말아라. 바람은 내 속에서도 오늘 소리없이 뜨겁게 불어온다”고 후기에 적었지만 그 마음의 밑바탕은 사물에 대한 경이와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 시집에서 봄을 주제로 한 시 몇 편을 함께 보자.

눈 속에 첫 동백이 붉게 익었다
그 위로 바람이 분다
그런 밤에 강변 갈숲에선 물새들이 뜨거운 알을 낳고
밤새도록 몸밖으로 긴 부리를 내두르며 운다
-「早春」

충남 연기군 남면 상공을
아기 갈매기 네 마리가 눈부신 흰 깃을 펄럭이며
일직선으로 난다
아아, 첫 비상이다
-「봄」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봄 논」

어느 해 봄, 원효로에서였던가
복국집의 복어국을 마시다가 어느 중이 불쑥 말했다
“봄 보지 가을 좆,
봄 보지 가을 좆“이라고

아 오늘밤 시퍼런 봄바다에 싸락눈 치겠다
물고기들 솟구치겠다
-「오늘밤」

봄은 만물이 약동하는 계절이다. 긴 겨울을 추위와 웅크림 속에 떨던 만물 앞에 나타나는 봄은 그렇지 않아도 경이일진대 하물며 시인의 눈 앞에서랴. 붉게 익은 첫 동백꽃의 빛, 첫 비상하는 아기 갈매기의 눈부신 흰 깃, 마른논에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는 모두 얼마나 싱그럽고 눈부신 경이인가. 그것에 시인의 눈과 마음이 직관적으로 닿아 거기에서 봄을 끌어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라. 그것은 모두 팽팽한 긴장과 절제를 견지하고 있지만 또한 봄처럼 싱그럽고 유려하다.
그리고「오늘밤」이란 시. 이에 대한 김주연의 평을 들어보자. “남녀 성기를 속어 표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앞에 봄, 가을이라는 계절을 갖다놓고 있는 이 시는 얼핏 매우 당혹스럽다. 그러나 외설스럽다거나 상스럽다는 느낌 대신 무언가 싱싱하면서 힘찬 분위기가 가득 차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봄, 가을과 같은 계절이 성기와 결합되면서 나타나는 효과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성기 자체가 역동적인 힘을 얻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성적 에너르기 내지 정열의 상징인 성기라 하더라도 문명과 공해 속에서 위축되고 왜곡된 듯한 분위기를 일소하고 자연과 합일하면서 홀연히 야성으로 회귀하는 강한 느낌을 던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논리다. 즉 봄, 가을이라는 계절이 보지, 좆이라는 표현에 의해 마치 성행위를 앞둔 인간들의 모습으로 구상적, 입체적인 어떤 힘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시의 모습은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정태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시는 곧 자연 예찬시로 받아들여져 왔고, 그 이미지는 식물적인 범주를 넘어서오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자연과 서정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곧 음풍농월 속에서의 퇴영적 허무주의나 패배주의를 지닌 것으로 비판되어왔다. 그러나 이시영 자연시의 이 질탕할 정도로 힘찬 기운을 보라. 그는 몇 구절을 적어놓은 다음에 바로 ”아 오늘밤 시퍼런 봄바다에 싸락눈 치겠다/ 물고기들 솟구치겠다“고 말함으로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싱싱한 성적 에너르기의 전개와 그 운동을 늠름하게 묘사한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의 움직이지 않는 눈에 의해 그려지는, 움직이지 않는 풍경이 아니라, 그 스스로 솟구치고 결합하고 전진하는 창조적 주체로 부각된다.”
하기야 이시영은「詩」라는 시를 통해, 어느 날 밖은 영하 20도의 강추위인 아침, 자고 일어나 보니, 유리창에 아기 다람쥐 한 놈이 바짝 붙어서서 맑은 눈길로 나를 뻔히 올려다보는 것을 보고 “아, 저 두 눈!/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감고 갔던 저 두 눈!”이라고 외치며 그걸 시라고 정의하니 이는 경이가 시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천양희나 이시영의 시는 결코 경이의 바탕이나 이면이 되는 삶의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 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 천양희「그믐달」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
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
-이시영 「무늬」

다음으로 슬픔의 전율에 대한 시를 살펴보자. 어쩌면 인간사에 있어서 슬픔만큼 보편적인 것이 어디 있으랴. 보들레르가 말했던가.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에 있으랴” 라고. 문학은 상처의 산물이다. 그 상처는 항시 슬픔을 수반한다. 생로병사의 인생고인 다음에야 슬픔을 통과하지 않고는 사실 누구도 진정한 삶이나 구원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먼저 우리나라 시에서 제일 슬픈 시 두 편을 읽어보자.

「山役」 - 임홍재

아버지는 한세상
남의 송장이나 주무르기만 할 것인가.
진눈깨비 흩날리는 황토마루에
정성들여 광중이나 짓고
외로운 혼이나 잠재울 것인가.
마지막 다문 입에 동전 하나 물리고
칠성판 바로 뉜 후
종내는 한 줌 흙이 되고 말 시체 위에
흙을 뿌리고 눈물을 뿌리며
오오호 달구 오오호 달구
輓歌만 부를 것인가.
피통 터져 농약 먹고 죽은 농부야
삼베올 구멍마다 맺힌 눈물을
기러기가 쓸고 가는데
이 땅에 진정 데불고 갈만한 것이 있더냐.
농부는 죽을 때 피를 토하고
色身고운 씨앗을 뿌리고 간다는데
부황이 나도 토사가 나도
아버지는 신들린 사람처럼 山役만 할 것인가.
밤마다 술에 취해
북망산 먼 줄 알았더니
방문 밖이 북망이라
황천수가 먼 줄 알았더니
앞 냇물이 황천술세
울음 섞인 가락을 토해내며
北邙山 누우런 황토를 수북히 털어놓는데
품팔러 간 어머니는 왜 돌아오지 않는가.
황토마루에 진눈깨비 내리고
어지럽게 어지럽게 도깨비불만 오르는데
아 아버지의 輓歌는 언제 끝날 것인가.

<대청에 누워> - 박정만

나 이 세상에 있을 땐 한간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놓을 터이니
딸기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는 한철은
뒤엄 속의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우리 시의 슬픔은 가난과 정치적 억압 때문에 발생한 바가 크다. 그 슬픔이 너무 크면 원한의 감정으로 변하고 또 그것은 체념 섞인 한으로 가슴속에 옹이져 삶의 부정성에 끈질기게 간여한다.
위의 시「산역」도 일평생 남의 송장 염이나 해주고 광중이나 지어주곤 밤마다 술에 취해 돌아와 울음 섞인 가락과 핏빛 황토를 수북히 털어놓는 가난한 아버지의 슬픈 생애를 노래한 것이다. 오죽하면 “삼베올 구멍마다 맺힌 눈물을/ 기러기가 쓸고” 갈 것인가. 임홍재의 시는 눌리고 찌들린 삶에 대하여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의 진폭을 두루 표현한다. 전통적인 반응의 하나는 ‘恨’이라는 것인데, 그의 시에 한이라든가 그에 유사한 정조로서 숙명주의나 허무주의적 느낌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시를 쓴 임홍재의 삶 역시 너무도 슬픈 것이어서 38세 되던 어느 날 개천에 떨어져 죽어 있는 주검이 발견됨으로 결론이 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무게와 위엄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공동체적 관심과 의식이 사라져버렸던 데에서 기인한 이 슬픈 죽음은, 삶과 삶의 크고 작은 계기가 가장 미천하고 짐승스럽게 영위되고 삶의 외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데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임홍재식의 죽음은 오늘날 부익부 빈인빈의 천박한 자본주의적 구조에서는 사실 항상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대청에 누워」라는 시도 그 배경을 보면 너무도 슬픈 시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작가 한수산의 필화사건에 누명을 쓴 채 걸려들어 심신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시인이 방황의 삶을 살다 죽어가기 전에 쓴 시다. 그러니 비록 표면적으로는 노장적 사상으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지만 그것은 목이 메이고 가슴이 치미고 창자가 끊기는 배경이 있어서 가능했던 시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정약용의「哀絶陽」이란 시를 보자.

갈밭 마을 젊은 아낙 곡소리 구슬프다/ 현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에 호소하 네./ 구실 면제 안 해줌은 있을 수 있다지만/ 남근을 잘랐단 말 듣도보도 못하였소./ 시아버진 세상 뜨고 아이는 갓난 앤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렸구나./ 억울함 하소차니 문지기는 범과 같고/ 이정은 고래고래 소마저 끌고 갔네./ 칼 갈아 뛰어들자 피가 온통 낭자터니/ 아들 낳아 곤경 당함 제 혼자 한탄한다./ 잠실의 궁형이 무슨 잘못 있었으랴/ 민 땅의 자식 거세 진실로 슬프고나./ 자식 낳고 사는 이치 하늘이 준 바이니/ 건도는 아들 되 고 곤도는 딸이 되네./ 말 돼지 거세함도 가엽다 말하는데/ 하물며 백성이 뒤이을 일 생각함이랴./ 부잣집은 일 년 내내 풍악을 울리면서/ 쌀 한 톨 베 한 치도 바치지 않는구나./ 다같은 백성인데 어찌 이리 불공평한가/ 객 창에서 자꾸만 시구편 읊는다네.

다산이 강진 유배시에 직접 견문한 사실을 시로 쓴 것이다. 蘆田에 사는 백성이 아들을 낳은 지 사흘만에 軍籍에 올라 里正이 소를 빼앗아가자, 방에 뛰어들어가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며 칼을 뽑아 자기의 남근을 스스로 잘라버렸다. 그 아내가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아무리 하소연하려 해도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나마 이미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의 군포도 꼬박꼬박 내고 있던 터였다.
백골징포가 무엇이던가. 이를테면 사람이 죽어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 신고를 하면, 동사무소 직원이 아예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죽은 사람 앞으로 세금 고지서를 날려보낸다. 황구첨정이란 무엇이냐.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출생신고를 하고 나면 그 다음날로 징집통지서가 날아드는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더러 빨리 입대하든지 군포를 내라고 야단을 부린다. 정작 장정은 하나뿐인데 돌아가신 아버지와 난 지 사흘밖에 안 된 핏덩이의 군포 독촉 끝에 이정은 목숨보다 중한 소까지 끌고 가버렸다. 눈이 뒤집힌 가장은 칼을 뽑아 이정을 찌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자신의 남근을 자르고 말았던 것이다. 『목민심서』는 이렇게 말한다. “심하게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짓고, 여자를 남자로 바꾸기도 하며, 또 그보다 심한 것은 강아지 이름을 혹 軍案에 기록하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개이며, 절굿공이의 이름이 혹 官帖에 나오니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정말 절굿공이이다.” 웃어야 할 일인가. 울어야 할 일인가. 어쨌건 삼정의 문란을 말할 때, 당시 이를 증명하는 어떤 통계수치보다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그 시대 백성의 절규를 실감으로 듣게 된다.
이 시는 슬픔이 너무 커 원한으로 차오른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이다. 이보다 더 발전한 것이 저 7-80년대의 투쟁적 민중시였다. 그러나 다음의 슬픔을 의연히 극복하는 두 시를 보아라.

「탈상」- 김명수

슬픔을 벗으려
베옷을 벗는다

人畜이 잠들고
모닥불이 사윈다

못다 탄 뼈 추스려
깊이 묻을 때
새벽별 한점 홀로
눈물 머금고
비로소 人家도 형체가 드러난다

동네 아낙 눈물로 지은 베옷을
찬물에 머리 감고 함께 벗으며
눈물을 그치거라!
목멘 형제들아

버들은 물이 올라
강가에 푸르르고
들판에는 기심도 자라오른다

풀피리 강둑에서 불어준다고
강물은 잔잔하게 흘러가랴만

가을걷이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이
혼곤히 한방에서 잠들고 있다

<탈상>- 허수경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둘 다 탈상을 소재로 해서 쓴 시인데 김명수의 시는 1982년 이 시인이 광주에 왔다가 돌아가 쓴 시라고 한다. 오월 민주항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형제들을 위하여 아무리 힘들어도 베옷을 벗고, 눈물을 그치고, 압제자들의 풀피리 장단에도 동요치 말고, 다시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곡진하게 제시한다. “가을걷이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이/ 혼곤히 한방에서 잠들고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허수경의 시는 어떤 개인적인 죽음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비록 배우자가 죽고 홀아비만 남았지만 고추모는 옮겨야 한다. 그 어린 고추모는 아마도 남은 아이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고추모들은 슬픔을 먹고 자라기도 한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없기에 그렇고, 결국 그 슬픔이 썩은 자리에서 붉은 고추가 익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도 개인적인 것보다는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랄지 “남녘땅 고추밭”이랄지 하는 표현들을 보면 역시 오월 민주항쟁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슬픔은 뭐니뭐니 해도 사랑의 희비에서 오는 슬픔이 가장 보편적이고 영원한 게 아닌가.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의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울음이 타는 가을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집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것네

슬픔 중에서 제일 큰 슬픔은 아무래도 사랑의 슬픔일 것 같다. 신경림의 시에는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공장에 다니는 이웃의 한 젊은이가 사랑을 나눌 단칸방 하나가 없어 서러워하는 것을 보고 쓴 시라는 얘기가 있다. 그게 어쨌든 가난하다고 해서 어찌 외로움과 두려움과 그리움이 없겠으며, 가난하다고 해서 어찌 사랑을 모르겠느냐고 독백을 하는 시인의 슬픈 마음이 너무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가난하다고 해서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마저 버려야 하기 때문에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는 네 울음”이 가슴에 크나큰 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니 이를 어쩌랴.
반면에 박재삼의 시는 사랑의 슬픔이란 그 보편적 주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시다. 고향의 큰집에 제사를 지내러 온 화자가 마음도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이 되어 고향에 남아 있는 친구를 만난다. 그리하여 그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강둑을 거닌다. 아마 친구는 사랑을 잃었거나 사랑을 떠나보냈거나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얘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보다보니 어느덧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이 나고, 때마침 제삿집에 켜지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노을이 반짝이는 가을江엔 온통 울음이 타고 있는 것만 같이 여겨진다. 결국 시인은 친구에게나 자기에게나 강물이 산골물에서 시작되듯이 그런 산골물 같은 첫사랑이 있었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그 다음의 생긴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소리 죽인 서러움의 강물로 다 녹아나고, 마침내 그저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니, 그 마음이 한없이 한없이 서러울 거라는 건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오죽하면 그 강물에 울음이 붉게 타겠는가.
소설가 김성동은 슬픔이 없는 문학은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문학은 상처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상처의 아픔을 슬픔으로 다스릴 수 있다. 그것은 그 슬픔이 깨끗한 슬픔 곧 순수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김영석의「썩지 않는 슬픔」이란 시에 나오는 슬픔이 그런 순수에 닿아 있다. “멍들거나/ 피흘리는 아픔은/ 이내 삭은 거름이 되어/ 단단한 삶은 옹이를 만들지만/ 슬픔은 결코 썩지 않는다/ 옛 고향집 뒤란/ 살구나무 밑에/ 썩지 않고 묻혀 있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흰 고무신처럼/ 그것은/ 어두운 마음 어느 구석에/ 초승달로 걸려/ 오래 오래 흐린 빛을 뿌린다.”

지금까지 경이와 슬픔을 통해 시가 찾아오는 순간을 얘기해 보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물과 순정의 시인 박용래에게는 경이와 슬픔이 하나였던 바, 항상 그의 눈물을 부른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들이었다. 박용래에게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은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등등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한 떨기의 풀꽃, 한 그루의 다복솔, 고목의 까치둥지, 시래기 삶는 냄새, 오지굴뚝의 청솔 타는 연기, 보리누름철의 밭종다리 울음, 삘기배동 오르는 논두렁의 미루나무 호드기 소리, 뒷간 지붕 위의 호박넝쿨, 심지어는 찔레덤풀에 낀 진딧물까지 누리의 온갖 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사랑스러운 것을 만날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뿐인가. 우리 겨레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다음의 詩語들을 보라. 대싸리, 모과, 능금, 이끼, 달개비, 민들레, 엉겅퀴, 괭이풀, 목화다래, 상수리, 수수이삭, 미루나무, 원두막, 바자울, 쇠죽가마, 잉앗대, 횟대, 멍석, 모깃불, 성황당, 옹배기, 목침, 베잠방이, 얼레빗, 실타래, 옥양목, 까마귀, 동박새, 반딧불, 베짱이, 소금쟁이, 물방개, 버들붕어, 메기, 쏘가리, 조랑말, 먹감, 기적소리 등도 그의 경이와 슬픔의 전율 속에서 우리의 영원한 시적 자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下棺>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濁盃器>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굴렁쇠 아이들의 달.
자치기 아이들의 달.
땅뺏기 아이들의 달.
공깃돌 아이들의 달.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달아, 달아
어느덧
半白이 된 달아.
수염이 까슬한 달아.
濁杯器속 달아.

<點描>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二重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망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三冬>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어나는 불빛이여 늦은 저녁
床 치우는 달그락 소리여 비우고 씻는 그릇 소리여
어디선가 가랑잎 지는 소리여 밤이여 섧은 盞이여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어나는 아슴한 불빛이여

아르드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허위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서정을 향한 끊임없는 동경은 참혹한 전기의자의 고통 속에서도 결국은 죽지 못했던 운명을 갖고 있다. 그 서정의 극점에 경이와 슬픔이라는 전율이 있다. 그런데 박용래의 시들은 위의 시들에서 보듯 남의 추측을 불허할 만큼 細筆에 의한 소묘로서 전위적인 抽象마저도 원천적으로 포괄하지만, 특이하게도 하나의 시에 경이와 슬픔이 동시에 교직되거나 용해되어 모든 시들이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경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목이 메이는 슬픔이 소리 죽인 채 숨어있는 것이다.
싱그러운 삶은 언제나 전율을 일으킨다. 슬픔을 끌어안는 삶 또한 전율을 일으킨다. 죽음이나 사회적 공포도 전율을 일으킨다. 불의에 대한 격렬한 분노도 전율을 일으킨다. 그뿐인가. 아침 연못에 백련이 순결하게 피어오르는 순간, 광활한 바다로부터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와 절벽에 부서지는 순간, 가을날 양광이 샛노란 나락밭을 백리 밖까지 밝히는 순간, 팔월 대보름의 커다란 보름달이 온 동네를 비추는 순간, 넥타이 같은 길이 산모퉁이로 사라지는걸 보는 순간, 그 길 외진 곳에 피어난 청초한 얼레지꽃을 보거나 그 길섶에서 울려나는 여치울음소리가 발자국 소리에 문득 끊기는 것을 겪는 순간, 컴컴한 마루 밑에서 10여 개나 되는 달걀을 문득 발견하던 어릴 때의 기억, 달밤에 장독 뒤에서 등물을 하던 이웃집 누나의 하얀 엉덩이를 훔쳐보던 기억, 아흔일곱 살까지 살도록 결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동하며 사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그 막막하던 슬픔의 순간,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고 들리는 것이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 등등 우리는 어쩌면 날이날마다 전율 속에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시보다는 다른 것에 더 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가 쌓은 벽 속에 갇혀 환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푸른 세상을 향한 창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창을 열면 닭장 같은 아파트나 빌딩숲, 전쟁과 같은 소음, 먼지에 막힌 뿌연 하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왜소한 일상 탓이다.
예술은 이런 일상을 탈주하려고 하는 것이다. 탈주는 새롭게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출처 : 유진의 삶을 시처럼 시를 삶처럼
글쓴이 : 유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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