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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봉교 詩人의 詩에대한 感評./2007년 2월 17일/이용대시인 본문

시 비평

[스크랩] 서봉교 詩人의 詩에대한 感評./2007년 2월 17일/이용대시인

오선민 2010. 6. 9. 08:51

(感評) 서봉교 시인의 시에대한 감평.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라는 시를 중심으로.

 

과거를 현실로 끌고 온 시.

 

우리가 시를 쓸 때의 그 시제(時制)는 대략 네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지나간 시절에 체험적으로 겪었든 사실을 떠올리며 시를 쓰는 경우가 있고 (2)현재에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절실한 감정으로 표현해 내는 시가 그것이고 또 (3)미래에 대한 어떤 예측을 염두에 두고 예지로서 시를 써는 경우가 있다하겠다. 여기서 하나 더 추가하자면 (4)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벗어나 오직 상상과 그 어떤 상징들을 질서정연하게 구상하면서 쓰여지는 시가 있다고 본다.(우주적 공상시: 앞으로 이러한 시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모든 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가 과거에 대한 생각이나 추억이나 기억들을(실제적 체험이나 경험들) 현재로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렇게 이끌어 낸 사실 중에 어느 지정된 한 대목을 특별히 오려내어 잘게 잘게 반추하며 구체적이고도 단정한 맛을 풍기는 새로운 시들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반추된 사실을 구체적이고도 구획적으로 정리하여 시라는 틀 안에 입각시켜 놓고 표현상의 모든 기법들을 오묘히 응용(환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시라는 것은 반추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절대로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시란 시 창작의 모티브(motive/동기나 근거/혹은 실마리)가 된 어떤 사실과 이로 인하여 발생한 시인자신의 심연에서 퍼 올려진 사유들을 선택된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질서 있게 정리한 것이다.

반추하여진 감정들을 여하히 걸러내고 또 추려내고 골라가며 앞 뒤 좌우를 살펴 깔아놓는 응축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부언해서 하나 더 덧붙이자면 세상에 회자하는 모든 시적 이론은 시인이 알아야 할 기초일 뿐이지 실제적으로는 그 수많은 시의 이론들을 하나 하나 다 따르면서 시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시의 이론적 요소들이 한 편의 시속에 일시에 혼재되어지며 쓰여지는 것이라는 것을 시인들은 알아야하고 또 이 시론 때문에 의욕적인 시 창작에있어서는 조금도 흔들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기본으로 하면서 서봉교 시인의 시에 대해 잠시 내 나름대로의 감평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1. 시대별 연결 사항.
이 시를 외각에서 바라보는 시간대적 흐름은 이렇다.
아주 어린 시절(아부지 등에 업혀갈 때) 과 고등학교 시절을 거처 군에 입대하여 훈련하든 때와 지금이라는 시간대가 연결되고 있는데 사실인즉 이 시를 쓰게 된 시간적 단계는 그 역순으로 모든 기억은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본다.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연결 시간은 서 시인의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하겠다. 즉 과거의 일들을 하나하나 거꾸로 연결시키면서 이루어 낸 점층법적 시의 형태라 볼 수 있겠다.아울러 이 시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 또한 이 모든 연결된 스토리가 시간대별로 존재하고 있는  시인의 이 이야기를 이와같이 시로 연결하여 나타내 보임으로써 그동안 심적으로 쌓여있기만했든 어떤 응어리를 속 시원히 풀어내는 자기 정화(카타르시스)라는 면모도 볼 수 있게하는 그러한 시이다.

 

2. 전체적 구도.
이 시의 전체적 줄거리는 "아버지의 냄새"라고 볼 수 있다. 즉 시의 제목처럼 이 시의 속뜻은 꼭 담배 냄새 그 자체만은 아닌 것이다.그런데 이 아버지의 냄새란 도회지에서 맡을 수 있는 그러한 몰 인정적이고 타산적인 냄새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어떤 냄새인가.
어릴 때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가장 최고이다. 예를 들자면 친구와 싸울 때 만일 내가 지고 있었다하자. 그 때 생각지도 않게 아버지가 오는 모습이 보인다하면 없든 힘도 갑자기 생기고 사라져 가든 용기도 하늘까지 치솟는 법이다. 즉 아버지는 절대자였고 천군만마의 구원병이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등에 업혀 뒤숭숭한 초여름밤 개구리 울어대는 논둑 길을 갈 때 맡았든 혈연적이고도 평온한 냄새 그것이였든 것이다. 따듯한 등에 업혀 온갖 어린 걱정 다 내려놓고 금방 잠이라도 들것 같은 그러한 부자유친의 목가적 냄새였든 것이다. 이러한 오랜 심적 잔영의 반추를 되새기게 하는 단어 하나가 보이는데 그것은 2연 5행에 있는 "구수한 새마을 담배내음"이 그것이다.즉 "구수한 내음 " 그 자체이다.구수한 내음. 인간적이고 전원적이며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코끝에 맴도는 그러한 본능적 아버지의 냄새인 것이다. 사실 뭇 동물들은 생체적으로 모든 냄새들을 유난히 잘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취각이 발달됨으로서 같은 식구를 판별하기도 하고 먹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모든 생존 활동을 이 취각에 의존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늘 땀이 벤 아버지 작업복에서/나던 그 내음/인 것이다. 성장기의 서 시인의 몸에서도 이 냄새가 베어있든 그러한 고향의 냄새이지 막연한 담배 냄새 하나만을 꼭 꼬집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담배 냄새는 과연 지금과는 어떠한 연결점이 있다는 것인가.
이 냄새는 고등학교 시절 화장실에서 친구들이 피워대던 그러한 담배 냄새가 아니었고 또한 군대 훈련병 시절 몇 모금 피워보았든 그러한 도피적이고도 자학적 목적의 담배도 아니었다.

 

3.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중간적 단계.
여기서 하나의 우수한 문장 구성의 도법을 보게되는데 그것은 4행과 5행 그리고 단독 6행을 대치해 놓고 있음에 그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겠다.
4행과 5행에서는 호기심 많았든 고교시절 야릇한 흥분과 초조 속에 몰래 숨어 피우든 그러한 담배 냄새를 반추하고 있다.그 때의 그 것은 일종의 소년티를 벗어나려는 청년기의 몸짓에서 왠지 모를 반항 비슷한 심리상태의 반작용으로 피우기 시작하든 그러한 담배였고  단지 하나의 의미없는 "냄새"에 불과했다. 그 것엔 어느 깊은 생각이나 철학적 사고에 의해 자행되어진 끽연이 아니었기에 그 냄새란 도무지 기억에 남기고 싶지않는 그러한 것으로 남아있다. 그러한 나이에 철 부지로 행해졌든 흔적들이 비단 이것뿐이었겠는가. 만일 이 사춘기 때의 냄새를 총칭해서 말한다면 비릿한 풀 냄새에 불과했을 것이다.
탈 규범적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한 시대를 잘라 놓고 본다면 시인에게 있어서는 추억할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었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가 6행에서 말하듯 군인으로 소집된 후에 몇 모금 피우게 되었든 그러한 담배 냄새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사실 군 생활이란 정서적으로 매우 매마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집단 생활이다.이곳에서는 언제나 엄격한 정신적 육체적 긴장만이 요구되는 일사분란의 기계적인 생활행동만 허용되었든 특수한 사회이다.사람에 따라서는 이루 측량하기 힘들정도의 정신적 공항과 심적 부담이 연속되어지는 황량한 곳이기도하다.여기엔 어떤 개인적인 감정 따위나 병사 개개인의 개성은 전적으로 무시되는 곳이기에 오직 명령 그 하나만 존재하는 몰인정한 특수집단이라 해도 무방한 곳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곳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운다는 것은 하나의 휴식이요 과잉 긴장 신경을 풀어주는 이완작용도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이 때 피우게 되는 담배란 그 맛이나 냄새를 음미한다는 시간적 여유를 떠나 오직 일종의 정신적 도피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이러한 긴장 상태에서의 담배 냄새란 전혀 몰인정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어느 물체가 타는 그러한 연기와 냄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든 것이다.그래서 이 때의 담배 냄새에서도 "아버지의 냄새"는 결코 맡을 수 없었든 것이다.

 

4. 냄새.
위에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그러면 이러한 아버지의 냄새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시 시 내부로 돌아가 작품의 본문에서 그 냄새를 한번 찾아보기로 한다.
/국방색 전투복 상의를 입은/아부지 등에 업혀갈 때/나던/구수한 새마을 담배내음/그 냄새가 아부지 냄새였다/ 라고 시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든 아버지였고 서 시인은 분명 농부의 아들이었다.이러한 농촌에서는 좀 값이 싼 새마을이라는 저급 담배들을 많이들 피웠었다.농촌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란 대개가 그 몸에서는 항상 흙 냄새와 땀 냄새와 잘 감지 않은 머리칼 냄새 그리고 작업복 냄새들이 항상 복합적으로 풍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디서나 사람 사는 생활이란 마찬가지여서 늘 그 어떤 고민이 있게 마련인데 여차 저차한 고민들을 성냥불 그어 불을 붙여 한 모금 품어내는 담배 연기로 날려보내기도 하고 풀어 보내기도 했든 것이 사실이다.이러한 냄새가 바로 곧 아버지의 냄새였든 것이다.

 

5.이 시의 정리.
이러한 연결 고리에서 본다면 이 시는 이렇게 단축해 볼 수도 있겠다.

 

상략/


아부지 등에 업혀갈 때/
나던/
구수한 새마을 담배내음/
그 냄새가 아부지 냄새였다/

늘 땀에 벤 아부지 작업복에서/
나던 그 내음/

 

그 후/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무엇을? 담배를. 의 단어가 함축적으로 생략되었음)

 

그런데도 매일/
사람들 옆에만 가면/
아부지 냄새가 난다/  

 

라고 요략해 볼 수도 있겠다.

 

6.유전적 냄새.

그러므로 다시 본론으로 돌아 와 아버지의 냄새란 도대체 무슨 냄새라는 말인가?
그것은 곧 <내 냄새>였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아버지의 우성인자가 전해진 객체로써 끝없이 분열하며 상장해 왔든 원세포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피붙이요 아들인 것이다.그러니까 아버지가 즐겨 피우든 그 담배 냄새만 맡아도 세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시인은 몹시도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본인 자신도 아예 담배를 피우기조차 강력히 거부해 오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왜냐하면 그토록 사무치는 아버지에대한 생각을 한 순간이라도 잊기위해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7. 짧은 감상:
이 시는 12연 7행으로 되어있는 주지적 혹은 이지적 서정시이다.즉 담배 냄새에 얽힌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완성한 일종의 사부시(思父詩)의 내용이고 과거의 추억들을  단계별로 이끌어내며 반추한 점층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하겠다.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어찌 이것뿐이랴.그렇다 하드라도 그리운 아버지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다 시로 표현해 내기란 불가능인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추억의 한 토막을 이와같이 대표적으로 잘라내어 반추하며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요점들을 우겨넎어(함축) 보다진하게(응축)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상적 수평적 사고들을 형이 상학적 승화 차원으로 끌어올려 놓고 잘 다듬은후 한편의 작품다운 작품으로 단장하여 시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라하겠다.

 

8.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다 라고 한다면

1) 담배 냄새를 맡으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해 놓고 본인이 담배를 피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는 어디에고 명확한 답을 얻기가 쉽지 않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가 아버지가 그리워서 그렇다 라든지 아니면 아버지가 담배를 피웠기에 싫었다  라고도 해석되어지는 대목이 있는데 즉 그것은 /그런대도/와 /우라질/에서 아주 헷갈리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즉 시의 앞 연들을 보면 본인은 분명 담배를 피우지 않고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담배 피우는 사람들 옆에 가면 아버지 냄새를 맡는다 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냄새가 반대로 역겨운 냄새였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냄새로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인지 문맥의 통일성에 비추어 볼 때 좀 애매모호하다고 보여진다.이것은 시의 뒷면에 숨겨진 시인의 숨기운 뜻이라고 보기도 힘들고 독자들이 매꾸어야 할 공간의 남김도 아니라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를 생각한다 해 놓고 일부러 /우라질/이라는 비어를 사용했을리가 만무하기도 하다.

왜 /우라질/이라고 했을까.하기사 아버지가 전혀 못 듣는 곳에서는 역설적으로 한번쯤 투정적 애교로 해 몰만하기는 할 일이겠지만. 그러나 감상하는 독자를 위해서라면 문장 구성의 의미전달만은 분명히 해야 된다고 본다.이러한 단어는 극히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임엔 분명하다 하겠다.

그리고 접두사나 접속사의 명확한 선택 사용에도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아부지 /라고 한 아버지와 /우라질/의 독백에 대해.
글쎄요. 아직은!

아주 간혹 어떤 시에서 이러한 속어나 발음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는데 이것은 일종의 기교라고 볼 수 있다(기교라는 뜻을 작자는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위에 말한 /우라질/과 같은 계통의 단어나 /아부지/같은 단어 사용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직은 아니라고 본다.아버지의 냄새를 그토록 못잊어했으면서도 끝판에 가서는 왜  /우라질/이라고 신경질을 부려야 했는지..생각하기도 싫었다는 것이였을까 아니면 또 그생각이 나게한다는 투의 자기 비아냥이였을까.이것은 이 시를 쓴 시인만이 알 수 있는 독백인 것이기에 독자들은 그 시 감상끝에 오는 약간의 씁쓸한 뒷 맛만 가지게할 뿐이다.

무엇이였나? 시인의 설명을 한번 듣고 싶어진다.

 

3)이 시의 전반 부분이 약간 설명조의 표현이라 한다면?

이러한 나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 먼저 시 전문(前文)을 아래와같이 한번 줄여 본다면 어떠할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ㄱ)    /모내기 할 적/

ㄴ)    /아버지 등에 엎혀 큰집에 갈 때/

ㄷ)    /맡았던 구수한 새마을 담배내음/

ㄹ)    /그 냄새가 아버지 냄새였다/

ㅁ)    /늘 땀이 벤 작업복에서/함께 나던 그 내음이/.....라고.

 

이렇게 해 보아도 전체적 문맥 자체는 그다지 손상되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미안하게도 이렇게 내 임의로 한번 바꾸어 본것은 이 시 전체에서 흐르고있는 일관된 의미를 참 좋게 보았기 때문이지 그 외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면서 또 서 시인의 깊은 양해를 구한다.다시말해서 "어버지의 냄새"가 과연 어떤 분위기에서 풍겨나던 냄새였다는 것을 내 비쳐주기 위해서 11연이나 달하는 막대한 분량을 제공하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하겠다.

 

4)그러나 시 한편 전체를 지극히 객관적이고도 나의 관조적 심상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참으로 잘 짜여진 시라고 여길만하다고 하겠다.어릴때 깊이 각인되었든 그 기억이 현재의 시상으로 떠올랐었다. 이것을 보다 명확히 보조하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과 군 시절의 작가의 태도를 분명히 그려 넎음으로써 다시 한번 현실의 심적 상태를 확고히 투영시켜내는 시적 구도는 높이 살만하다고 하겠다.

 

9.맺는 말.

자유시란 정형시의 반대되는 개념의 시로써 알다시피 본래 어떤 형이나 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는 약 100여년에 불과하지만 고 중세의 신앙문학에서 인본주의적 개인문학으로 옮겨오면서 낭만주의문학이라는 형틀을 벗어나 실존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기게된 시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자유시라해도 무엇을 방만하게하거나 일정한 질서도 없이 온 사방을 어지럽히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따라서 분명히 있어야 될 것은 사념의 질서와 보이지 않는 내재적 어떤 느낌의 줄기 하나쯤은 분명히 나타내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그 표현 형식은 단계적 표현 엮음으로 한다든지 아니면 상충적 혹은 충돌적 대치에서 절충적이고도 독창적인 문학성을 이루어 내는 결합이나 그 어떤 적응을 취한다든해도 좋다.아니면 아주 영원한 대칭의 상태로 그냥 놔 둠으로써 그 결론은 독자의 몫으로 한다든지..그것 또한 자유이다.

박진환 선생이 쓴 그의 대시론집(大詩論集)에서도 그 모든것을 한마디로 집약하자면 즉 시 기법이나 시론에 충실하되 결코 그것에 억매이지는 말라는 것이다.자유시를 써는 우리들로서는 그 어떤 형식,어떤  형태의 것도 차용할 수 있는 것이며 영시(英詩)나 한시(漢詩)나 정형시(定形詩) 및  그 어떤 영력도 자유로이 넘나들 수도 있는 것이다.이러한 이 모든 현상을 배움으로써 잘알고 수용하되 이것을 날것으로 남겨두지말고 내것으로 소화해서 새롭고도 신선한 것으로 변용하여 멋있는 시를 만들어내야만이 아는 것에대한 본래의 효용성이 있게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의 시 속에는 응축된 본인의 특유한 스토리가 있어야하고 지향하는 각도 또한 분명해야한다고 본다.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가장 우려하는 점이 시 내용전체가 애매모호하며 우유부단해서는 그것은 시가 아니라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해지는 위험을 경계하라는 것이기도 하다.시에서는 어떤 철학적이며 추상적 개념의 언어보다가는 구체적 사건에 입각한 시어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다.아울러 시는 철학이 아니라고 보기에 관념적이거나 수사학적 표현도 경계해야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시는 진리나 철학을 전달하는 문학 형식이 아니라 시인의 특수한 <느낌>을 전해 줌으러써 독자와 함께 공명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보기때문이다.이러한 <느낌의 전달>이 곧 시향(詩香)이라는 것이다. 향기 없는 꽃은 꽃이 아니다.만일 꽃에 향기가 없다면 그 어떤 눈먼 벌이나 나비조차도 깃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향이 없는 시에는 독자들을 향한 그 어떤 느낌도 전해주지 못할뿐더러 어느 누가 향기 없는 나의 시를 찾아 올 것이겠는가.

산문시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은유>나 <숨김>이라든지 <얼비치>고 <스며들고> <베어남>이라는 시의 고차원적 특성을 도외시한체 모든것을 풀어 씀으로써(해체시) 시소설, 시콩트, 뭐 시수필,이라는 기형아 같은 것을 배출하게도 하였다(포스트모더니즘/특히 시에서 있을 수도 없는 대화체의 시 등).(산문시와 운문시에대해서는 나중 나의 다른 思考에서 말할 것이다).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시>라는 본질을 경솔하게 망각하면서까지 행해지는 개척이란 그 뿌리가 결코 튼튼치도 못할분만 아니라 그리 뭐 오래 가지도 못할 것이라고 본다.이러한 것은 시의 변질이지 변화는 아닌것이라고 본다.

산문시나 해체시가 지금 <유행?>이라는 말을 들을었때 나도 내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문학에서 유행이 어디있다는 말인가.다만 작가의 문학적 특성이 있을 뿐이지.

고전주의에서(신앙주의) 낭만주의(초월주의)로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인간주의)로 자연주의에서 과학주의(개성주의) 및 실증주의로  여기서 현실주의 및 초현실주의로 옮겨 오면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몹시도 복잡한 정신세계에서 사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것은 인간 그 자체가 그마만큼 우주적이라는 것이지 복잡하다고해서 꼭 혼돈(混沌)스러운 것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이 모든 것들이 다만 혼재(混在)되어 있는 것 뿐이다.혼재되어 있는 것 중에서 각자는 자기에 알맞는 그리고 훌륭한 자기의 문학적 체널을 찾아 소질을 갈고 닦으면 되는 것이다.그러나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미(美)이며 무엇이 우리가 최종적으로 추구해야할  시정신(詩精神)의 상위개념인가는 분명히 알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하이튼 서 시인의 시들을 몇편 읽고 인생의 선배로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란 "지나친 것은 좀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다" 라는 말을 전하면서 이 미천하고 치졸하기만한 위의 나의 글을 감히 마치려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완벽한 시란 결코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문운을 빌면서

 

2007.2.17일  서울.

가촌.     

출처 : 서봉교시인의서재입니다
글쓴이 : 만주사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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