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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스크랩] 시집<계모같은마누라>평설/박진환박사님

오선민 2010. 6. 9. 08:52

 

시집 평설



反動形成, 그 역설의 미학


박 진 환

(문학평론가․文學博士)




1. 前提


일찍이 시를 체험으로 규정한 것은 릴케다. 시를 체험으로 본 배경에는 19세기적 관념이나 정서와 같은 유동성의 유희를 극복, 형상으로 빚어냄으로써 사물이나 존재로 고정화하려는 실념철학의 요청과 함께 시간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간 예술로의 이동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를 담아내는 容器로서의 시적 역할이 깔려 있다.

시가 체험에서 출발하게 되면 감각적 체험에 의존하게 되고, 감각적 체험에의 의존은 이미지의 미학을 필연화 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지의 미학은 다시 형상화를 필연화 하게 된다. 곧 관념이나 정서와 같은 무형의 것을 형상으로 빚어내 사물이나 존재로 현현내지 재구성해낸다는 뜻인데 이 때문에 시는 곧 이미지라는 극단적인 명명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19C적 정서나 관념은 구시대의 유물로 물러서게 되고, 20C의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구력을 통해 형상이나 존재로 현현됨으로써 형상미학에서 시를 출발시켰던 것이 된다.

이로써 보면 체험시학은 시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시학이나 시법에서 시를 출발시키게 하는 일대 전환의 출발기점을 마련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출발한 것이 20C 시이고, 그래서 20C 시는 이미지의 미학을 그 본질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된다.

시는 주어진 시대를 구가하는 시대적 반영일 수도 있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체험의 형상화 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주어진 시대나 삶을 넘어서서 새로운 삶으로 이동하거나 이끌어 올려 형상으로 빚어내는 창조적 경로를 통한 언어예술이기도 하다. 그 어느 경우에 해당되건 시인이 한편의 시로 드러내는 것은 생의 발견이자, 이를 형상으로 재구성에 냄으로써 형상미학에 귀결될 수밖에 없게 된다.

서봉교 시인의 시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그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생의 진솔한 체험들이 편편 마다 스미고 베어나 그의 생의 단면들을 형상으로 조망해 볼 수 있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시는 시인 스스로가 겪은 生體驗의 발상에서 시를 출발시킴으로써 극한적 치열성을 수반하고 있고, 그 때문에 매우 선명한 리얼리티로 각인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부에 나누어 총 72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는 시집의 중심자리에는 2부와 3부가 놓여질 것으로 보이는데 2부와 3부의 시편들이 여타 파트의 시편들에 비해 보다 투명한 삶의 현장성과 치열한 생의 도전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타 부분의 시를 밀쳐두는 것은 아니다. 1부에서의  사랑에서 발상된 정서적 체험이나 4, 5부에서 보여준 가버린 것에 대한 소중한 기억의 간직 같은 것들도 치열성이나 현장성에서는 맛볼 수 없는 밀도 있는 친근성을 체험하게 해주고 있어 값진 시편들이 되어주고 있다.

시를 제시, 서봉교 시인의 시를 들여다보았을 때 그의 시적 본질이나 특성들은 그 본태를 드러낼 것으로 보여진다.


2.  가족의 소중함을 발상으로 한 시편들


서봉교 시인의 시적 본적지는 뭐니뭐니해도 가족을 중심으로 발상된 가족애 적인 것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血統의식이나 가족사적 서사성보다는 부부애에서 체험되는 사랑과 삶과 생존의 치열한 현장성을 발상으로 해서 시를 출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제시해 본다.


가) 우리 집사람은

꼭 술 먹고 늦게 자는 날만 일찍 깨운다

이슬에 취해 거실에 쓰러져 자다 기상해보니

새벽 4시 40분

TV를 켜고 박지성 축구를 보고 있는데

5시 20분경

마누라 왈

자기야 아들 우유 타

‘네’

후반전이 끝날 무렵 또 한소리 한다

밥 앉혀

쌀을 담궈놨길래

그냥 부으려는데

큰소리로 

쌀 씻어

‘네’


시집「계모같은 마누라․2」의 일부이다. 夫唱婦隨라는 전통적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뜨려지고 있다. 女必從夫라는 남편의 권위는 온데 간데 없고 되레 거꾸로 남편이 아내를 좇는 전혀 새로운 관념을 탄생시키고 있다. 어렵게 해석할 것도 없이 文意 그대로 고분고분 아내의 지시대로 따르는, 말을 만들면 男必從婦라는 새로운 용어를 성립시키고 있는데 주객이 전도되는, 전통맥락의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예시 부분만이 아니다. 같은 시 5연 ‘얼른 거실과 방을 닦았다/아마도 우리 집사람은 계모인가 보다/군대 경험으로 난 가끔 청소며 밥이며 설거지를 한다’든지, ‘어제는 큰맘 먹고 이혼 서류를 가져 왔다나/아침에 들이밀기에/군말 없이 인감도장을 찍어주고는/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집을 펼쳐 본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흡사 아내에게 사육 당하거나 아내와의 주종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다.

李箱의 소설「날개」에서의 경우와 흡사하다고 할까, 어떻든 이런 경우 그것이 왜곡, 날조, 위장, 은폐의 反動形成의 자아방어수단으로서 자의식의 발로이건, 이와는 반대로 의도적으로 자동전달되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관념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낯설게 쓰기 이건, 아무튼 충격적 발상의 신선함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경우는 예시만이 아니다.「맞벌이하는 낭군의 소원․1」이란 타이틀의 2편의 시와「맞벌이 낭군의 비애」1, 2에서도 이런 예는 잘 나타나 있다.


가) 남편 능력이 부족하여

같이 맞벌이 한지가 13년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맞벌이는 이제 일상 생활 


마누라 야근하는 날이면

남의 손에 맡긴 아들도 데려와야 하고

밀린 설거지며 밥을 하고

아들녀석의 배설물을 씻어야 한다


나) 집에 오니 둘째 딸은 TV를 보고

셋째 딸은 인터넷을 하고

영어 학원 간 큰딸은 귀가 전이다.

아침에 한바탕 육박전을 치른 싱크대에서 밥솥의 밥을 덜고

아이들 줄 뜨거운 밥을 하고

김치를 볶고 된장찌개에

내 속처럼 매운 청양 고추를 썰어 넣고

그렇게 마누라 오기 전에 우리는 저녁을 먹는다


예시 가는「맞벌이 낭군의 소원․2」의 2, 3연이고 나)는 「맞벌이 낭군의 비애․1」의 4, 5연이다. 앞의 예시「계모같은 마누라」시편과 연계맥락을 고스란히 같이 하고 있다. 맞벌이하는 아내 대신 밥하고 국 끓이고 설거지하며 주부역할을 대행하는 맞벌이 낭군의 소원과 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화자의 진술들은 사실을 왜곡, 날조, 위장, 은폐한 일종의 역설로 봐야 온당할 듯 싶다. 그것은 계모같은 마누라 밑에서 男必從婦해야 하는 낭군의 소원과 비애가 기실 사실이 아닌, 사실로써는 드러낼 수 없는 것을 새로운 사실로 이동, 고정관념을 깨뜨린 곳에서 새로이 탄생시킨 관념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일종의 낯설게 쓰기다. 낯설게 쓰기가 의도적 제작이란 사실은 익히 잘 아는 바이고, 낯설게 씀으로써 자동전달되는 고정관념을 극복, 새로운 관념으로 재구성, 새로움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한 의도적 제작이란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서봉교 시인은 낯설게 쓰기를 시법으로 원용, 자신의 시에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게 한다.


3. 육신의 고통, 시로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


서봉교 시인의 또 하나의 시적 중심자리에 놓을 수 있는 것이 육신의 고통을 시로 승화, 카타르시스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자아방어기전이다.

시집 3부를 장식하고 있는 이러한 시는 그가 당한 교통사고와 그 후유증으로 아파해야 하는 교통사고 후유증과 이를 극복하고자 아픔과 대결하는 치열한 의지지향을 담고 있다.

극한 상황에서의 도피가 아닌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이를 시로써 승화시켜 고통에서 벗어내고자 하는 문화적 치유방법이 곧 서봉교 시인의 또 하나의 시적 특질로서 생체험에서 발상,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게 하는 문화적 수단에 의탁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시를 제시했을 때 이해를 도울 것으로 여겨진다.


가) 날이 흐리거나

눈, 비 오기 직전에는

발정난 수사슴처럼

미쳐 버린다

그래 이미

두 번 죽었어


한 번 더 죽으면

이 발정기(發情期)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쓰잘데 없는  

척추들의

발기(勃起), 

발기들. 


나) 이렇게 흐려서 고통스런 날은

차라리 죽고 싶다


죽어서 끝나는 고통이라면

한 3일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고 싶다 


설령 이게 꿈이 아닐지라도

매일 살아야 하는 날들이라면 


이젠 벗어나고 싶다


예시 가)는「교통사고 후유증․1」의 일부이고 나)는「교통사고 후유증․2」의 전문이다. 두 예시는 공히 밖으로 드러난 文意로 보면 생의 포기를 통한 고통으로부터의 일탈로 보여진다. 그 때문에 아픔의 강도가 어떠하리란 점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잘 들여다 보면 이 또한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아픔으로부터의 일탈을 위해 죽고 싶다는 충동을 토로하는 그 자체 속에는 차라리 죽어버림으로써 아픔에서 해방되기를 희망하는 것과는 달리 살고싶다는 의지지향을 이와는 다른 사실로 위장, 前景化하고, 그 후경에는 아픔으로부터 벗어나는 아픔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희망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자는 아픔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을 노래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곧 왜곡, 날조, 위장, 은폐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일종의 디펜스 메카니즘으로서의 자기 방어의 수단이고 이를 달리 명명해 反動形成이라고 하는데 서봉교 시인에 있어서의 시는 곧 이러한 반동형상으로서의 자아 구원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지적하면 인간은 무엇인가를 내면에 감추고 있게 되면 몹시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를 밖으로 던져버리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때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밖으로 던져 버려야 한다. 그것이 곧 投射다. 서봉교 시인의 경우도 같은 이치여서 아픔을 던져 버리는 수단으로서의 시를 통한 형상화로 카타르시스함으로써 아픔에서 해방되고 싶어했다는 이치를 성립시킨다는 뜻이다.

이로써 보면 서봉교 시인의 시적 중심의 구심력으로서의 가족 내지 교통사고 후유증은 일종의 反動形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계모같은 마누라 밑에서 소망했던 ‘맞벌이 낭군의 소원’이나 ‘맞벌이 낭군의 비애’는 기실 보다 가정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아내와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왜곡, 날조, 위장, 은폐했다는 점에서 反動形成이 가져다 준 역설의 미학이 될 수 있게 된다.

그런가 하면 후자의 경우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수반하는 고통과 아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아픔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고 싶다는 것은 기실 살고 싶다는 삶에의 의지지향을 왜곡, 날조, 위장, 은폐한 일종의 디펜스메카니즘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보면 서봉교 시인의 시는 가정을 지키는데 자칫 수반하기 쉬운 애정의 결핍이 가져다 줄 위기의식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치유되지 않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종의 위장의 진술인 反動形成을 감행한 것이 된다. 물론 이 경우 정신분석학적 해명이 요구되지만 그 보다는 시적 해명으로 대체해야 온당 할 것 같다.

현대시의 시법을 대표하는 낯설게 쓰기는 일종의 왜곡이자 날조이며 은폐이자 위장의 변용의 미학이다. 곧 의도적으로 낯설게 꾸며 쓴다는 뜻인데 그 때문에 시가 역설의 미학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점에서 보면 서봉교 시인의 시는 낯설게 쓰기를 차용한 역설의 미학을 자신의 시법으로 차용한 것이 된다.


4. 결어


의도적 제작으로서의 낯설게 쓰기 시법을 자신의 시에 실천한 서봉교 시인의 시는 이쯤에서 대충 밝혀졌다고 본다. 특히 서봉교 시인이 스스로의 생 체험을 형상으로 빚어내어 前景化의 위장으로 재구성해 보여준 것은 그가 시법을 알고 자신의 시를 출발시킨 것이 되고 이 점에서 그는 시류나 타성을 극복, 자신의 시를 정공법의 궤도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점에서 그는 현대시의 귀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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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봉교시인의서재입니다
글쓴이 : 만주사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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